brunch

매거진 책과 영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담 Jun 05. 2016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Aprilis 독서일기 3 ㅡ 삶이 나를 지겨워하는 것 같을 때

더 이상 이해가 되지 않는 순간 행위는 정지합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 결정>  중


어린 시절 어느 날 폭파사건으로 정신 병원에 수용돼 거세당하고 실험당하다가 나와서, 100살 가까이 온 세상을 누비며 살다가 분노 속에 폭파 사건을 일으켜 자기 삶을 정지시키고 다시 갇혀버린 노인의 이야기가 있다. 그의 이름은 알란이고 폭탄 전문가이며 온 세상의 모든 정치적 사건에 관련됐고 많은 범죄를 저지르고 나중에 행복해진다. 이 책은 줄거리도 문체도 유쾌하고 재밌다. 그렇다면, 그러므로 가벼울까. 난 이 책이 그 어떤 역사서보다 심오하다고 생각한다. 알란을 통해 일종의 현대 신화를 '짐짓' 구현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세계를 다 이겨먹은 알란은 어떤 사람일까


1. 주인공 알란의 삶을 가능하게 한 알란의 특징은 무엇인가?    
알란의 가장 큰 특징은 유연함이다.    

 

그에겐 원칙이 없다. 알란은 자기만의 기준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세상이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그는 관심이 없다.  윤리와 도덕의 무거움조차 알란 앞에서는 농담거리가 된다. 도둑질과 살인 아무렇지 않게 하는 그가 어떻게 우리의 맘을 부드럽게 하는 것일까?      


소설 전체에는 두 가지 세상이 존재한다.  법, 사회, 타인의 기준, 정치, 이데올로기, 종교 등으로 표면화된 '~ 해야만 한다.'의 세계, 그리고  의리, 사랑, 욕망, 선택으로 표면화된 '~ 하고 싶다.'의 세계.  전자는 강요와 원칙을 앞세워 타인의 욕망을 억압함으로써 질서를 유지한다면 후자는 선택과 책임을 전제로 타인의 욕망을 존중함으로써 새로운 세상을 구축한다. 전자는 무언가를 지켜내기 위해 다수가 희생되는 세상이라면 후자는 파괴로서 다수가 행복을 찾아내는 세상이다.     


알란은 상처받지 않고 복수하지 않는다.    

 

그의 관심사는 행복이 아니라 기쁨이다.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그것에 몰입해서 독보성을 획득함으로써 돌파구를 찾아낸다. 돌파구를 찾고자 무엇에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몰입해 축적한 모든 것이 미래 삶의 열쇠가 된다. 알란은 마음에 안 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미래에 묶여 현재를 굴복시키지 않는다. 그의 삶은 가볍다. 감옥에서도 수용소에서도 죽음 앞에서도 그냥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그의 내면에 인지부조화 따위는 없다. 그는 직장 상사가 괴롭히면 직장을 그만두는 사람이다.    


알란은 소신 있는 유연함으로
소통할 줄 안다.  


   

그는 친구에게 자신의 가치관과 취향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에 타인이 자기의 수용범위를 넘어가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유연함은 휘둘림과 다르다. 친구를 위해 두 배로 일을 할지언정 찡찡대는 건 하지 말라고 진지하게 말할 줄 안다. 그의 소통능력은 솔직함과 풍부한 경험을 통해 얻은 폭넓은 공감대와 매력에 있다. 교언영색과 감언이설 따위의 술수와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그의 초연함과 자유로움은 어디서 왔을까 그냥 원래 타고난 걸까? 그는 아빠의 가출, 엄마의 초연함, 가난, 폭발사고, 정신병원에서의 억압, 거세 등 끊임없이 끔찍한 경험을 했다. 그가 무엇을 배웠을까? 아마도 받아들이는 것을 배우지 않았을까 인생에 일어날 일은 일어나며 꼭 내가 잘못해서 벌어지는 것만도 아니고 잘못을 아주 안 한 일도 없다는... 사는 것이 그렇지 뭐... 하고 넘겨 버릴 수밖에 없었던 고통의 시간...


알란은 우리 모두가 겪을 만한 모든 아픔을 겪어본 고통의 아이콘으로서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자기연민에 목숨 거는 우리를 비웃듯 초연하다. 뭐라고 잔소리도 안 하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그가 사람을 죽이는 것은 범죄자의 돈을 범죄로 소유하는 것은 그냥 눈감아 줘도 되는 것일까 정말로 그것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문제일까 만약 그렇게만 쓰였다면 이 책은 가벼운 통속소설과 다를 바 없지 않나. 분명히 알란의 이야기는 우리 무의식의 무언가를 건드리고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2. 역사의 전개와 알란 개인 삶의 전개에 비추어 볼 때 정치적 입장이라는 것에 대해 이 작품이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지키려고 애쓰는 모든 것은 우습다.    

알란의 삶과 세계사는 순전히 개인이 가진 삶의 열정 또는 특성에 대한 세계사의 부름으로 전개된다. '한 사람'이 그 자리에 없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허무맹랑한 가정이야말로 진짜 삶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세계사는 '개인 역사의 집합체'일뿐이다. 그는 반응할 수 있는 능력으로 각각의 자리에서 세계를 움직였다. 정치적 종교적 입장 따위 그에겐 없었다. 정의와 애국심 그런 것은 그가 돌파구를 만들 때 사용하는 수단일 뿐 그의 정체성을 이루는 요소는 아니다.


세상의 부름에 반응할 만한 능력이 그대에게 있는가 그 능력만이 그대의 존재를 증명한다.


역사를 움직인 것은 개인의 능력과 역사적 상황의 만남일 뿐이다. 소설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우린 이미 알란 편이 아니던가? 만약 그가 누군가를 '찍' 죽였기 때문에 아직도 마음이 편치 않다면 조금 더 파고들 필요가 있겠다.     


알란은 비정치적 인물인가?    


알란의 초년기가 우리가 겪는 고통을 대표한다면 그의 100년은 인류의 1세기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겠다. 그 역시 전 생애-100년 -에 걸쳐 누군가는 친구로 누군가는 적으로 만드는 삶을 살았고 그의 의사와 상관없이 역사에 깊이 개입했다. '100세가 된 이후'의 며칠간의 삶을 통해 그는 한 무리를 만들었다. 그의 친구들은 알란을 구심점으로 공동체가 되었다. 그들은 그들의 욕망을 위해 '어쩔  없이' 살인을 했고 법을 어겼고 회유와 타협 거짓말을 했다. 그들의 모든 행보는 스탈린을 닮았고 미국 대통령을 닮았으며 정신병원의 박사를 닮았다. 그와 그의 친구들은 정치적이고 그들의 살인은 작은 전쟁이다. 정치에 휘말리고 싶지 않고 전혀 정치를 알고 싶지 않다는 그의 원칙 자체가 이미 정당의 모토가 된다. 맘에 맞고 거슬리지 않는 친구와의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는 소망은 재력과 인맥을 통해서 실현된다.  그는 정치를  증오하는 정치가다.


우리는 왜 이토록 정치적인 그를 받아들이는가   


그의 삶이 행복해 보이기 때문이다. 행복을 추구하지 않음으로써 행복을 찾고 명예와 학위를 비웃음으로써 기득권 위에 올라서는 그가 억압된 우리 자존심을 세워주기 때문이다. 그가 절대적으로 선하거나 옳거나 거룩해서가 아니다. 그저 내 맘에 들기 때문이다. 알란이 구축한 세계는 욕망 추구와 허용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배된다. 유연한 그의 태도는 유연함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딱딱한 것을 '거세'해 버리게 만든다.     


3. 그는 언제 정치적이 됐는가    


나를 건드리지 마. 너의 규칙을 나에게 강요하지 마.    


자유로운 영혼 알란에게 양로원의 삶지옥이었다. 그는 자기가 사랑한 고양이가 죽고서야 - 처음으로 그가 깊이 사랑한 대상이 이 고양이다 - 삶이 자기를 지겨워한다고 느끼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복수를 하고 복수의 대가로 양로원의 삶을 구형받는다.  그곳에서 그는 모든 것을 통제받는다. 그의 일상은 파괴됐다.


이제는 인생이 지겨워졌다. 왜냐하면 인생이 그를 지겨워하고 있는 것 같았으므로, 그리고 그는 남이 싫다는데 굳이 자신을 강요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삶과 죽음에 대한 통제감을 상실하고서 죽기로 결심했고 그것이 뜻대로 안 되자 결심한다. '도망' 치기로...  억압받는 삶에 대한 저항, 억압하는 존재를 피하는 몸짓은 도망으로 시작해도 정치로 귀결된다.


정치는 나쁜가? 정치는 머리 아픈가? 이데올로기는 그저 귀찮을 뿐인가?


100 년을 도망 다녀봐라 우리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고 편을 만들 수밖에 없고 나름의 기준으로 상황을 돌파해 나갈 수밖에 없는, 언제나 '창문'의 위치를 확인해야만 하는 이다. 하다 못해 고양이만 사랑해도 분노할 일이 생기는 감정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아닌 창문 너머 저쪽에는 다른 세상이 있다 분노와 절망이 우릴 어느 날 그곳으로 이끌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 내가 나의 무리를 모으고 연대할 수 있을지. 마련된 축적의 시간과 고난의 역사를 품고 자살이 아닌 도망을 선택했을 때... 그것이 옳은 건지  불안하고 겁이 날 수밖에 없다. 알란의 마지막 말을 보라.

 

오, 그렇다니 참 기쁘네요. 그렇다면 내가 기꺼이 도와 드릴 수 있지!


창문을 넘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알란이 투쟁적이어서 정치적인 것이 아니다. 그의 일생이 도망가야 할 정도로 침해당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오늘 하루 얼마나 많은 간섭이 나의 일상을 위협했는지 생각해 보면, 삶이 먼저 나를 지겨워할 만도 하다.


 그때 알란은 창문을 바라봤다.




<창문 넘어 도망친 백세 노인 > 요나스 요나손


매거진의 이전글 순간, 영원 속의 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