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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담 Jun 26. 2016

들키고 싶지 않은 지성의 고독 ㅡ 고슴도치의 우아함 1

Aprilis 의 독서일기 4 ㅡ1

들키고 싶지 않은 지성, 섣부른 이해와 기대에 대한 거부, 고독한 그들이 이루는 구원의 여정


<고슴도치의 우아함>은 몇 년 전에 내가 푹 빠져 있었던 책이다. 책을 좋아는 하지만 책에 대해 아는 것은 하나도 없던 내가 르네 아줌마에게 특별히 초대된 기분으로 문장과 사유의 성찬을 즐기고 나왔던 기억이 있다. 제목부터가 마음을 열기 충분했다. 고슴도치 그리고 우아함...



1. 목차

마르크스 – 동백꽃 – 문법 – 여름 비 – 팔로마


이렇게 5 부로 나누어져 있고 각 제목 아래 여러 장에 걸쳐 우아한 르네 아줌마의 1인칭 서술이 펼쳐진다. 각각의 장에는 아름다운 부제들이 붙어 있다. 전체 구조 사이사이에는 또 다른 주인공인 팔로마의 시점에서 서술되는  깊은 사색 16 개, 세상의 움직임에 대한 일기 7 개가 불규칙적으로 삽입돼 있다. 난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목차만 보고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분명 외로운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2. 너무 다르게 생긴 쌍둥이


작가의 말을 빌자면 이 소설은 ‘박식한 수아줌마라는 발상, 마치 고명한 대학교수처럼 말을 구사하고, 사회적으로 용인된 것으로는 결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문화와 예술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박식한 수위 아줌마라는 발상’에서 시작됐다. 작가는 이 생각에 사로잡혀 흥분상태에서 단번에 소설의 첫 열 쪽을 썼다고 한다.


부자들이 사는 아파트의 수위 그리고 그 아파트에 사는 부잣집 딸 이 두 사람이 주인공이다.

그녀들은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자랐고 살고 있으며 너무나 닮은 삶의 양식과 지성으로 세상과 맞서고 있다.


수위 르네 아줌마는 쉰네 살이고 아주 아주 아주 못 생겼다. 그녀는 어린 시절 단지 못생겼다는 이유로 동정받은 또렷한 상처가 있고 방어적 정신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정도가 너무 심각해서 사랑이나 결혼을 포기하고 살았었다.  다행히도 르네는 매우 훌륭한 남자에게서 열일곱 살에 ‘성급하지만 예의 바른 프러포즈’를 받았다.


‘난 음탕한 여자가 될 뛰어난 여자들이나 예쁜 얼굴 뒤에 참새 뇌 이상의 것은 없는 여자 중의 하나가 내 처가 되길 원치 않아.’
<고슴도치의 우아함 > 중 남편의 프러포즈


그녀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볼 수 있는 남자를 만난 덕에 그녀는 ‘못생긴 것도, 지적이고 책을 좋아하는 것도 숨길 필요 없는, 완벽한, 특별할 것 없는, 그리운 일상이 있는 결혼생활’을 했다. 남편과 함께 있으면 그녀는 그녀 자신일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27 년 전에 죽었고 이제 그녀는 모두가 넘겨짚어 생각하는 고정관념과 부합하는 수위로서, 최선을 다해 웅크린 채 살아가고 있다. 유일한 낙은 책이고 지적 욕구가 가장 강한 열정이다. 마르크스로 인해 골머리를 앓는 이에게 <독일 이데올로기>를 권하거나 포이어바흐 제11 테제를 인용할 수 있지만 절대 그런 능력을 들키지 않으려고 노심초사한다. 그녀는 사람들이 그녀를 알아보기를 원치 않는다.


다른 한 명은 열두 살 여자 아이다. 매우 명석하고 머리가 너무 좋아서 보통의 우등생들을 따라 함으로써 자기를 은폐하려 하지만 곧 명석함을 들켜 버린다. 그녀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고 모든 것이 계획된 자기 삶의 완전성이 세상의 모순임을 간파했다. 삶은 지루하고 모든 것이 모순 투성이다. 그래서 6월에 자살할 것을 결심했고 차근차근 준비 중이다. 세상이 살아볼 만한 것이라는 증거를 잡게 된다면 자살에 대한 계획을 심사숙고해야 한다는 것을 알 정도로 논리적이지만 아직 그녀를 감동시킬 ‘가치 있는 삶을 사는 존재’는 발견되지 않았다.


팔로마는 르네를 모르고 르네는 팔로마를 모른다. 두 사람은 각자의 특별함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지만 같은 공간에 매우 지적이고 냉철한 다른 존재가 본인들처럼 모습을 숨기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아직’ 모른다.


3. 맹목의 독학. 독학의 황홀.


르네를 알아갈수록 난 설렌다. 그녀는 사람들이 그녀에게 건네는 단어 하나하나에서 그 저변에 깔린 '태도'를 읽어낼 수 있다. 상대방의 무시를 인식함으로써 무시를 무시할 수 있다. 그녀는 평생 아무도 모르게 책 읽은 법을 배웠다. 그녀는 스승이 없었다. 서경덕도 박지원도 스승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지적 영역에 있어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했던 나는 그들이 스승의 없었던 것에 위안을 얻고는 했었다. 정통일 수 없으나 적어도 독보적일 수는 있는 길이라고 위안받았던 것 같다.


하지만 언제나 스승과 동문이 없다는 외로움이 있다. 제자를 키워내고 싶은 욕구는 나의 외로움에서 왔을 것이다. 때로 책에서 나는 닮은꼴을 우연히 만난다. 르네 아줌마도 그런 사람이었다. 이것은 나에게 엄청난 의미의 만남이었다. 들키고 싶지 않지만 소통하고 싶은, 혼자일 때에만 당당할 수 있는 소심한 거만함... 도망치고 위장하는 것이 능통한 재투성이 캐릭터, 그녀는 편견만 씻어내면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진주였던 것이다. 여기 나를 설레게 했던 그녀의 독백이 있다.


맹목은 독학의 등록상표
나는 그토록 많은 책을 읽었던 것이다... 하지만 모든 독학자들처럼 난 내가 책에서 이해한 것에 대해서는 전혀 자신이 없다. 그저 언젠가는 마치, 보이지 않는 가지들이 갑자기 뻗어 나 내가 산발적으로 읽은 모든 것들이 서로 엮어 지식 전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가, 그러다가 문득, 의미를 잃어버리고, 본질을 놓치고, 또 같은 줄을 다시 읽은들 아무 소용도 없고, 그리고 읽을 때마다 조금씩 더 나를 피해 달아나는 것 같았다. 그때 나는 메뉴를 몰두해서 읽은 다음 배가 부르다고 믿는 한 늙은 미친 여자 같아 보였다. 아마 이런 소질, 이런 맹목은 독학의 등록상표인 듯하다. 독학은 좋은 교육이 제공하는 확실한 지침을 주진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인 말과 글이 칸막이를 치고 모험을 금지시키는 바로 그곳에서 독학은 독학자에게 ‘생각의 자유’와 ‘종합’이라는 선물을 선사한다.

<고슴도치의 우아함 > 르네의 독백


오랜 시간 혼자 공부를 하던 시절, 나는 나의 지점을 읽어내지 못했었다. 어디까지 전전된 것인지 어디가 끝인지 이 문자들이 무엇과 만나야 하는지 누구와 섞여야 하는지 내가 내린 결론이 맞는지... 막막하고 잡다한 독서와 다시 보기와 밑줄 긋기와 인터넷 검색, 인과관계가 막힐 때마다 느끼던 암담함...


그런데도 나는 광기인지 고집인지 절박함인지   모를 더듬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막히는 모든 순간이 암담했고 알아내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런 것을 빠르게 배우고 흡수할 수 있는 잘 정리된 책들이 있었다. 난 그걸 일일이 부딪쳐보고서야 알았다. 그리고 처음엔 그것이 서글펐다. 실수하고 방황하는데 보낸 그 엄청난 시간들... 머릿속에 넣어야 할 것이 많아 몇 년 동안이나 자유로운 독서를 못했던 나에게는 이런 사람이 주인공인 소설 자체가 신선했다. 그녀가 읊조리는 말들이 나와 만나 흡수되는 느낌이었다.


독학자에게 '생각의 자유'와 '종합'은 선물이라니! 얼마나 아름다운 선언인가.

그땐 임용고사를 공부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때도 그랬고 지금 돌어봐도 그렇고 주변을 둘러봐도 그 공부를 그런 식으로 파고드는 사람은 없었다. 스터디를 가 봐도 그렇게 모든 작품을 스스로 분석해 보고 일반론과 대조하는 사람도 없었다. 어째서 그런 결과가 나오는지의 과정을 궁금해하는 사람도 만나기 힘들었다. 그들이 묻는 것을 내가 대답할 수는 있었으나 내가 알아내고 내가 궁금해하는 것을 내게 물어오는 시험지와 면접관은 없었다. 세상과 나는 관심사가 다르면서 같았다. 나의 정체성, 그러니까 내 시대 속에 내가 점한 위치에 대한 명확한 인식은 규정되고 다듬어진 세상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주 나중에야 깨달았다. 결에 따라 부드럽기도 하고 따갑기도 한 가시옷을... 나는 어느새 입고 있었다. 일부러 찌르진 않아도 방어의 지점은 명확하다.

이제 나는 독서법을 가르칠 수 있다. 책 설명이 아닌 책을 읽는 법


르네는 어느 날 현상학을 접한다. 그리고 재빨리 깨닫는다. ‘나는 현상학을 모르겠고, 난 그것을 못 참겠다.’ 그녀에게 빠져드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 지적 욕구를 충족한다. 의식하고 잘 보일 사람도 없고 그것에 대한 실망감과 자기연민도 없다.


고독해도 상관없다.
억지로 섞여 있는 것이 더 고독하다.


그녀는 그저 제대로 볼 줄 모르는 무지와 억측과 편견의 시선에 자신이 노출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미 난 그녀의 편이다. 그녀를 방해하는 모든 것이 나의 적이 되고 그녀의 친구는 이제 내 친구가 된다. 누군가 그녀를 탐낸다면 내가 먼서 나서서 선을 보려 들 것이다.


 이제 소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2014. 6. 23. 새벽 3시 19분. 비가 아주 많이 오던 날 시작 해서 2016년 6월 26일 다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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