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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담 Jun 27. 2016

호기심과 두려움 ㅡ 고슴도치의 우아함 2

여우의 독서일기 4ㅡ2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과정은 나를 돌아보고 읽어내는 과정이다. 처음 읽었을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기 때문에, 책은 그대로 있어도 지금의 나와 책이 다시 만나면 새로운 생각과 감동이 생성된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자기 보호적이기도 하고 자기 파괴적이기도 하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 해도 내 수준 이상을 읽어낼 수 없다. 독서를 통해 자기 파괴를 경험할 수 있다면 기뻐해야 한다. 내가 조금은 공부하는 시간을 보냈나 보다. 내가 조금은 부드러워졌나 보다.


르네의 책 읽기 


4. 싸움을 거부하면서
나는 그토록 많은 책을 읽었던 것이다... 하지만 모든 독학자들처럼 난 내가 책에서 이해한 것에 대해서는 전혀 자신이 없다. 그저 언젠가는 마치, 보이지 않는 가지들이 갑자기 뻗어 나 내가 산발적으로 읽은 모든 것들이 서로 엮어 지식 전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가,
그러다가 문득, 의미를 잃어버리고, 본질을 놓치고, 또 같은 줄을 다시 읽은들 아무 소용도 없고, 그리고 읽을 때마다 조금씩 더 나를 피해 달아나는 것 같았다. 그때 나는 메뉴를 몰두해서 읽은 다음 배가 부르다고 믿는 한 늙은 미친 여자 같아 보였다.
 아마 이런 소질, 이런 맹목은 독학의 등록상표인 듯하다. 독학은 좋은 교육이 제공하는 확실한 지침을 주진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인 말과 글이 칸막이를 치고 모험을 금지시키는 바로 그곳에서 독학은 독학자에게 ‘생각의 자유’와 ‘종합’이라는 선물을 선사한다.

  <고슴도치의 우아함 > 르네의 말


르네의 책 읽기는 독학의 시간이 길었던 나에게 많은 위안을 줬다. 그녀는 책을 읽어가며 A - ha 그래프를 그리는 성찰의 비약을 겪었으나 암흑 같은 고원 현상도 겪었고 그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어떤 조력자도 없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여성이다. 외모와 사회적 지위 때문에 겪는 편견에 대한 저항으로 철저한 고독과 격리를 선택한 그녀는 더 책으로 빠져들었다. 그녀가 책 읽기에 대해 책 초반에 언급한 이 부분은 그녀의 세상에 대한 갈망과 실망을 동시에 보여준다. 그녀는 너무나 세상을 알고 싶지만 세상이 자기를 알아줄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조용히 상대가 원하는 모습을 베풀어 보여주며 자기만 아는 자기로서 살아간다.


팔로마의 책 읽기


팔로마는 모든 것을 가졌다. 부자이며 명석하고 통찰력이 뛰어나다. 그리고 그로 인해 어떠한 가능성도 허락받지 못했고 정해진 길, 정해진 감정, 정해진 생각을 강요당한다. 그녀는 세상 속에서 사랑할 만한 어떤 존재도 발견하지 못한 '지루함'때문에 13세가 되는 생일에 자살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TV를 통해 두 명이 동시에 하는 다이빙 대회를 보며 문학 읽기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된다. 완벽한 일치를 해야 높은 점수를 받는 다이빙에 집중하며 거울 뉴런의 활성 상태임을 인식하던 그녀는 다이빙을 망친 찰나의 차이를 보고 짜증을 느끼고 그 짜증을 놓치지 않고 사색에 들어간다.


(...) 그래서 뭐? 저게 세상의 움직임이라고? 완벽함의 가능성을 영원히 썩게 만든 저 미세한 간격이? 나는 엉망이 된 기분으로 삼십 분 정도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사람들은 그녀가 다른 한 명을 따라잡길 바랐을까? 왜 동시적이지 않은 저 동작이 그토록 고통을 주는 걸까?
 그 이유는 그리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모든 흘러가는 것..., 우리가 말했어야 했던 모든 말들, 우리가 했었어야 했던 몸짓들, 어느 날 갑자기 솟아올랐지만 우리가 잡을 줄 몰라서 영원히 무 속으로 사라져 버린 그 최고 최상의  그 기회들... 간발의 차이의 실패...
하지만 '거울 뉴런' 때문에 전혀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그건 당혹스럽고, 게다가 어쩌면 어렴풋이 (나를 짜증 나게 만드는) 푸르스트적인 생각이다. 만약 문학이, 사람들이 자신의 거울 뉴런을 발동시키기 위해, 또한 싼 가격에 전율을 느끼기 위해 우리가 쳐다보는 텔레비전이라면? 그리고 더 나쁜 것은, 문학이 우리가 망친 모든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텔레비전이라면?

<고슴도치의 우아함 > 팔로마의 말


팔로마의 결론은 이런 행위가 대실패라는 것이다. 세상의 움직임은 실제 체험되었어야 했지만, 항상 대리만족이기 때문이다.  멍청이들은 텔레비전을 보며 조금 지적인 사람은 책을 보며 거울 뉴런을 이용하여 대리만족을 할 뿐 '체험된 움직임'은 없고 그것은 진짜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없다는 것이 '진짜 존재'가 없는 이 세상은 지루하다. 심지어 이 천재 녀는 자살조차도 그런 지루한 이에게 충격을 주지 않는 방법으로 '증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무나 합리적이기 때문에 이타적이다. 실제로 이 세상은 너무나 지루하다. 지루해서 지속하기가 너무 괴롭다. 이런 지루함을 공감하고 있는 지금 나의 뇌에선 '거울 뉴런'이 반짝이는 것이 아닐까? 나는 정말로 이 팔로마의 지루함을 '체험'했는가?



의 책 읽기


사람은 변할까. 사람은 안 변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난 변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분명 변한다. 나에게 좋았던 사람도 나빴던 사람도 변할 것라고 나는 믿는다. 책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내 변화의 지점을 확인하는, 적극적인 성찰의 과정이다. 두 사람은 책을 읽으며 어떤 과정을 겪고 있는 걸까.


 존재의 본질. 진실에 대한 갈망.


두 여자 모두 세상과 화합하지 못한다. 한 명은 거부 한 명은 소외에 의해 격리됐다. 두 사람 모두 방법적 회의론자들이다. 책은 그녀들의 생각을 점점 첨예하게 만든다. 그럴수록 세상과의 화합은 점점 어려워진다. 그들은 세상을 싫어할까? 그들에게 왜 이런 회의와 실망이 쌓이게 된 걸까?


두 사람 내면에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소통에 대한 두려움이 공존한다. 이 호기심과 두려움의 갈등이 끊임없이 구도적 질문을 만들고 있다. 그들은 질문할 수 있는 존재다. 그들은 세상이 보여주는 것을 보지 않고 볼 수 있는 것을 본다. 세상이 정한 규칙을 따르지 않는 그들은 비뚤어졌다. 난 그런 그들을 사랑한다. 내가 이토록 비뚤어진 그들을 사랑하게 된 이유는 내가 비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간절히 바라게 된다.  그들이 서로를 만난다면 세상을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세상은 더 이상 지루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나에게도 팔로마가 르네가 나타나길 간절히 바라본다. 책을 읽으며 나는 내 '체험'을 갈망하고 실천을 계획한다.


책을 어디까지 읽어야 할까.


거울 뉴런만 자극해 대는 독서가 사람을 어떻게 만드는지 난 너무 많이 봐 왔고 내가 그렇게 되는 것이 두려워서 멈춘 적도 있었다. 책장을 싹 비운 적도 있다. 언제까지나 읽는 데만 만족한다면 '메뉴판만 읽고서 배부르다고 하는 미친 여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교육과 복지와 사랑과 정치에 대해 읽어대는 것은 어느 시점까지는 훌륭하지만 한계를 넘어서는 체험적 움직임까지 나아가지 않는다면 허무와 자기기만에 숨이 막히는 장면과 마주칠 수밖에 없다. 독서로 연마된 머리가 르네처럼 '세상 때문이야'라고 핑계를 대거나 팔로마처럼 '합리적 사고 끝의 자기 파괴'로 이어질 수 있다. 난 그녀들이 그나마 건강하기 때문에 이런 과정을 거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이 궁극의 결론일 순 없다.


'이런 내용이 좋~!'를 넘어서서 '난 그래서 이렇게 살고 있고 이만큼 해 봤. 그런 사람 또 만나고 싶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세상을 미워하지 않아도 되고 자학하며 증발하기를 꿈꾸지 않아도 된다.


나에게만은 위험하지 않은 너, 

너에게만은 무례하지 않은 나.


르네와 팔로마의 만남은 너무나 감동적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위험하지도 무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조심스럽다. 아직 서로를 믿지 못하니까... 팔로마가 자기의 스펙과 재능을 이용해서 힘 있고 건강한 움직임을 실현함으로써 스스로가 세상 속의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길... 르네가 자기드러냄으로써 팔로마와 같은 존재가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대상으로 인식하는데 도움이 되길... 고슴도치라 해도 그들은 우아하기 때문에... 서로 가시에 찔리지 않는다. 그들에겐 가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말랑한 배를 감추고 있다. 생각하는 사람,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 질문을 갖고 있는 사람이 무례하거나 위험하다고 인식되고 있는 이유는 그들 자신이 가진 문제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가진 재능 때문이다. 격리도 증발도 필요 없는 세상이 올 수 있을까?


조금씩 그들이 서로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이제 인정하게 될 것이다. 빛나는 지성은 감춰지지 않으며 서로는 서로를 알아볼 수밖에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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