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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담 Jun 29. 2016

삶이 얼어붙어도 끝나지 않을 때 ㅡ고슴도치의 우아함 3

Aprilis의 독서일기 4 -3

왜 그들은 죽었을까


난 이미 이 책을 한 번 읽었고 어떻게 끝나는지 안다. 그래도 여전히 설렘으로 한 단어 한 단어에 몰입된다. 정해진 결말이라 해도 몰입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마지막 보다는 과정이 중요하고 존재는 사진보다는 동영상처럼 남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살아 있었다면 존재감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죽음은 아주 중요한 코드이다. 난 처음에 그것을 이해 못했다. 지금 차분히 아주 천천히 다시 이 책에게 다가가며 이 작품이 죽음을 통해 삶을 재조명했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1부에서의 현상학에 대한 르네의 조소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된다.) 죽음,질병, 이별... 이런 것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살아있음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르네가 경험한 죽음


르네는 과부다. 그녀의 사랑하는 남편은 뤼시앙이다. 1988년 발병한 병으로 십칠 개 월 동안 고생했고 크리스마스이브에 돌아갔다.


(전략) 병마가 한 가정에 들어오면, 그것은 단지 육체만을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 가슴 사이사이에 어두운 막을 치고, 그 속에서 희망은 매몰된다. 우리의 계획과 우리의 숨결을 휘어 감았던 거미줄 같은 병마는 하루하루 지날수록 우리의 삶을 삼켜버렸다. 집으로 돌아오면, 난 마치 작은 지하실로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늘 추웠다. 그 추위는 그 무엇으로도 녹일 수 없는 추위였고, 심지어 내가 뤼시앙 옆에서 잤던 마지막 며칠 동안엔 내 육신이 다른 곳에서 가져온 모든 열기를 그의 육신이 빨아들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후략)


그녀에게 남편 뤼시앙은 사랑 그대로의 존재였다.그녀가 그녀일 수 있게 배려하고 함께해 준 남자였다. 가족이 죽어가는 것에 길들여지는 과정에 대해 이보다 더 정확한 묘사가 있을까. 집에 아픈 사람이 있을 때, 그것이 죽음을 넘나드는 수준일 때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과 허무, 추위 속에서 살아있는 존재도 죽음을 닮게 된다. 르네는 처절한 죽음의 공포와 슬픔을 경험했다. 뤼시앙이 죽었을 때 그 아파트의 부자들이 남편을 그저 '무로 돌아간 비존재' 로 여기는 것에 대해 분노와 분리감을 느낀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닥치는 죽음과 불행은 당연하다는 생각하면서도 자신들에게 닥치는 작은 고통에는 호들갑을 떠는 모습을 조롱하게 된 것이다.


그녀에게 죽음은 상처다.



팔로마가 생각하는 죽음


팔로마의 할머니는 못된 사람이다. 평생 돈과 권력을 휘두르며 멋대로 살았다. 팔로마의 어머니가 할머니의 수발을 원치 않았기에 ‘대리석 욕조가 있는’고급 양로원에 들어가 있다. 팔로마는 양로원이야말로 모든 것이 끝나고, 남은 것은 죽음밖에 없는 존재들이 가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바둑에 대한 사색을 하며 죽을 땐 '무엇인가를 구축하면서 죽고 싶다'라고 생각했던 팔로마는 양로원이야말로 아무 것도 구축할 수 없는 곳이라는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현재는 없기 때문이다.


부자들의 삶... ‘대리석 욕조가 있는 고급 양로원’에 간 할머니의 ‘죽음만 남은 삶’은 그녀에게 두렵고 수치스러운 것일 뿐 아무 의미도 없다. 팔로마는 할머니의 가족이지만 죽음이 서서히 젖어드는 아픔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녀가 사랑을 할 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할머니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죽음은 그냥 증발이다.


 

부자 아파트에 깃든 죽음

이 아파트의 누군가가 죽었다. 그 죽음의 소식은‘생기롭게’ 아파트를 떠돈다. 이 아파트에 그의 죽음은 아무 의미가 없는 그저 '해프닝'일 뿐이었다.그런데 그의 가족이 이 아파트를 팔기로 한다. 이것은 대단한 '사건'이다. 보수적이고 변화를 원치 않는 과거 지향성이 강한 상류사회에 익숙하지 않은 무언가가 들어오게 된 것이다. 르네는 충격에 빠진다. 그녀는 익숙해 져야할 무언가를 맞이해야 하는 공포에 휩싸인다. 누군가의 죽음보다 그 후 폭풍이 더 의미 있는 사건이 된 것이다.


이쯤 되면 르네도 인정해야 한다. 그녀 역시 부자들이 먼저 그랬다는 이유로 타인의 죽음을 '무로 돌아간 비존재' 취급했다는 것을... 사실 뤼시앙이 죽었을 때, 부자인 거주민 중에서도 뤼시앙에게 애도를 표한 ‘한 노파’가 있었다. 르네는 그녀에게 집중하지 않고 ‘무심한 다른 사람들’에게만 집중했다.부자들에 대한 그녀의 고정관념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 르네에게만 집중하며 그녀를 알아채는 누군가가 나타난다면


그녀는 무너지고 말 것이다. 사실 그녀 몇 겹일 지 알 수도 없는 보호막 속에서 간절히 뤼시앙같은 존재와의 소통을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소외되고 약한 존재와 동물들에게 지극한 친절과 관심, 완전한 공감을 보이는 것을 통해 암시된다. 그녀는 지금 반쯤 죽은 상태이다. 뤼시앙이 죽으면서 부자 사람에 대한 이해의 영역은 포기 됐다. 꿈틀꿈틀 자신이 좋아하지도 않았던 거주민이 죽은 것에 애도를 표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면서도 억압하는 이유는 그녀가 지금 온전치 않기 때문이다.


이 부자의 죽음은... 그냥 해프닝이다.


 

내가 겪은 죽음과 삶에 대해


나에게는 한 살 터울의 쌍둥이 남동생이 있다. 그 중 막내가 20 대 초반, 군대에 있을 때 뇌출혈을 일으켰고 3일 안에 죽게 된다는 판정을 받았다. 태어날 때부터 뇌혈관이 기형이었다고 했다. 정해진 운명이었다는 것이다. 몇 번에 걸친 수술과 긴긴 병원생활 끝에 동생은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신체 건강하게 살아났고... 지적 장애가 왔다. 회복 후의 동생은 내 동생이기도 했고 낯설기도 했다. 나는 같은 육신에 다른 사람이 깃드는 것을 봐야 했다. 원래 한 살 차이 내 동생은 언제나 나와 두뇌 싸움을 하곤 했었다. 그런데 영혼이랄지 마음이랄지 생각이랄지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를, 동생의 내면을 채우고 있던 무언가가 다른 것으로 교체돼 버렸다. 상관 없었다. 살았으니까. 그것으로 우린 새로운 동생을 받아들였다.

 

동생이 병원에 있었던 몇 개월간 우리 식구 모두는 사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의 삶을 지속했다.나는 공부를 해야 했기에 영동 세브란스 병원의 의자나 간이침대에서 자며 노량진을 오갔고 춘천 집은 엉망이 되어갔다. 죽음의 영역에서 삶의 영역으로 동생을 되찾아온 우리에게 일상이 다시 시작됐다. 난 대학을 졸업했으니 사회에 나가야 했다. 삶은 지속 돼야 했고 가족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지만 가족에게는 당연히 동생이 최우선이었다.


동생의 회복기간은 나에게 잔인했다.


그러지 않아도 됐는데도 난 수입이 없으면서도 용돈 없이 임용고사를 준비했다. 그때 난 스물세 살, 정말 어렸다. 그런데 동생은 더 어렸고 이제 장애이었다. 이후 나는 절대 집에 손을 벌리지 않았다. 마음 어느 곳이 닫혔고 가족은 내가 의지해선 안 되는 존재가 돼 버렸다. 그런 일이 나에게 발생했다. 가족은 상징일 뿐인 시절이었다.


뇌 질환은 아주 무섭다. 기억은 왜곡되고 정서와 감정의 기복은 예측이 안 된다. 폭력적이었다가 아이 같았다가 착했다가 거짓말을 했다가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상상하고 나중엔 그 말을 믿고... 우리 가족은 그런 일을 당해 본 적이 없었다. 우리 가족은 그때 청소년기였던 것 같다. 모두가 동생 말을 믿었고 동생 편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취업 준비생의 막막함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대부분 동생 횡포의 피해자는 나였는데 차마 이 글에 쓸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동생이 정서적으로 안정되기까지 아주 긴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작은 왕이 돼 버린 동생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우리 가족이 중심을 잡기까지도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


난 기다려야만 했다. 돌파구는 공부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종교 공동체와 가족이었다. 사랑의 이름으로 철저하게 의무와 책임만 읊어대는...)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가족들은 그 시절 내가 얼마나 힘들었을 지를 깨달았그동안 난 독립했다. 그 시절도 지나갔다.


삶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우리가족 모두가 어렸을 때 겪었던 동생의 질병 그리고 그 이후 3대가 같이 사는 가족은 겪을 수밖에 없는 조부모님의 치매와 병수발 그리고 죽음... 원치 않는 이별... 삶은 아픔을 포함한다. 살다보면 원치 않는 일이 일어나고 많이 일어난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일이지만 일어났고, 발생한 일은 절대 취소되지 않는다. 삶은 상상이 아니다. 희망은 저절로 현실이 되지 않는다.


얼마 전에 아주 친한 친구의 아버지께서 항암 판정을 받으셨다. 나도 친구도 너무 슬펐다. 우린 같이 울었다. 하지만 우린 받아들이기로 했다. 울며 걱정하다가도 농담을 주고받고 먹고 살 일을 의논하고 절망하다가도 다시 농담을 한다. 내 동생은 아주 똑똑했지만 이제 똑똑하지 않고 어떨 땐 바보같이 군다. 그러면 우리 가족은 농담을 한다. ‘머리 수술 한 번 더 할래?’ 그리고 같이 웃는다. 내 동생은 아주 잘생겼고 날씬했지만 지금 아주 뚱뚱해 졌고 먹을 것에 집착한다. 이것도 우린 농담 재료로 쓴다. ‘애 들어섰니?’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차례로 치매를 앓으셨을 때도 엄마는 웃음을 잃지 않으셨다.힘든 순간도 많았지만 우린 농담을 주고받았다.



웃을 수 있다면

르네는 죽음의 한기에 몸이 얼었다. 웃음을 잃으면 살아갈 수가 없는데... 팔로마가 죽고 싶어 하는 이유는 비웃음 말고는 웃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파이 이야기>에서 파이는 이민하는 뱃길에서 파선을 당해 가족이 모두 죽었다. 호랑이와 한 배를 타고 태평양 한 가운데서, 죽는 것 말고는 길이 안 보이는 상황에서 오랑우탄 ‘오렌지 주스’가 멀미하는 것을 보고 깔깔대고 웃은 후에야 삶의 의지를 불태운다.


나에게 죽음은 그냥 삶의 다른 형태이다. 살면서도 사람은 여러 번 죽고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은유적으로) 죽을 때마다 힘들지만 잘 지나가면 같은 일이 다시 발생하진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죽음보다 못한 회피는 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팔로마의 자살 계획은 수정되어야 한다.


 


2014년 6월 30일 새벽... 3시 40여분




이후 또 몇 번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잘 받아들이지 못 했다를 반복했고 웃지 못 하는 날도 많았으며 이제 다시 웃는다. 어차피 깨달음은 현재를 위한 거니까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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