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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담 Jul 07. 2016

나를 반응하게 한 너의 한 마디

 <고슴도치의 우아함> 4


책을 읽는 내내 생각이 뱅뱅 돌고 마음이 뭉클했다가 뭔가를 깨달았다가... 만남이라는 주제로 내용을 정리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부터 마음이 무겁다. 독서에 대하여 정리하면서 나는, 우리의 깨달음이 삶이 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인가를 생각했다.


1.  ‘너’를 상상하지 않았던 삶에서 발견한 ‘너’ - 너를 발견하는데 드는 시간


그 해프닝처럼 죽은 부자의 집에 새로 이사 온, 부자라서 모두의 관심을 받는 일본인 오주 씨. 그가 르네의 생애 최초의 남자친구가 됐다. 그는 순식간에 르네를 은둔의 수위실에서 끄집어내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불쌍한 천재 팔로마와는  친구가 된다. 그리고 팔로마는 르네의 수위실을 점거하게 된다. 르네는 오주의 등장에 두려움과 동시에 강한 유혹을 느끼고 그 유혹을 떨치지 못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오주 씨가 르네에게 건넨 말 ‘그러나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저마다 다양하지요.’ 르네는 이 말이 오주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흠칫 놀라고 만다. 이것은 <안나 카레리나>의 시작 두 번째 문장이다. 그리고 그녀의 소스라침을 오주가 눈치챘다. 너무나 무방비 상태여서 알아들은 것을 들켜버린 것이다. 오주는 르네의 고양이 이름을 묻는다. 르네의 고양이는 '레옹'이다. (레옹은 톨스토이다- 레오 톨스토이. 둘에겐 이제 접점이 생겼다.) 나중에 르네는 오주의 집에서 일하게 된 메이드 친구를 통해 오주네 고양이 이름을 알게 된다. '레빈''키티'... <안나 카레리나>의 등장인물들이다.


평소 르네는 <안나 카레리나>에서 레빈이 노동의 즐거움을 깨달으며 여름 비를 맞는 장면을,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꼽아왔었다. 이제 은둔은 끝장이 났다. 그녀는 발견당하고 말았다. 몇십 년을 오고 가며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그녀를 단 몇 분 만에 파악한, 단정한 예순 정도의 이 남자가 주목하기 시작했다. 오주는 우연히 승강기에서 만난 꼬마숙녀 팔로마에게 수위, 미셸 부인에 대한 의견을 묻는다. - 당연히 오주는 이때도 몇 마디 말로 팔로마를 알아보았다. 오주의 ‘질문’ 때문에 팔로마는 르네에 대해 생각을 우리에게 말할 기회를 얻었다.


미셸 부인... 어떻게 말해야 될까? 그녀는 지성으로 번득인다. 그런데도 그녀는 노심초사, 그래, 그녀는 수위처럼 연기하려고, 그리고 멍청하게 보이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훤히 보인다. 하지만 난 그녀가 장 아르텡스에게 말할 때, 디안느의 등 뒤에서 넵튠에게 말을 걸 때, 자신에게 인사도 않고 지나치는 이 건물의 부인들을 바라볼 때, 난 그녀를 관찰했다. 미셸 부인 그녀는 고슴도치의 우아함을 지니고 있다. 겉으로 보면 그녀는 가시로 뒤덮여 있어 진짜 철옹성 같지만, 그러나 속은 그녀 역시 고슴도치들처럼 꾸밈없는 세련됨을 지니고 있다고 난 직감했다. 겉보기엔 무감각한 듯하지만, 고집스럽게 홀로 있고 지독하게 우아한 작은 짐승 고슴도치.

<고슴도치의 우아함 >- 팔로마의 깊은 사색 9


이 부분을 읽을 때 난 지하철을 타고 어디론가 이동 중이었고 눈물이 또르르 또르르 맺히는 걸 느끼며 읽어 내려갔다. 팔로마가 르네 아줌마를 관찰하고 있었다! 팔로마는 어떻게 르네를 알아챘을까? 팔로마는 어느 날 르네와 부딪쳤고 그때 르네가 읽는 책의 출판사를 보게 됐다. 팔로마는 이 사건을 통해 르네의 독서 수준이 심상치 않음을 알게 된다.


단 몇 초의 시간이 들었을 뿐이다.



존재의 발견은 찰나에 이루어진다. 이 명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고 말한다. 첫눈에 반하는 것은 성적 반응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일까? 친구든 연인이든 찰나에 발견되고 결합되는 사람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순식간에 ‘너’라는 존재가 내 심장에 와서 박힐 수도 있다. 어떤 말, 어떤 표정, 어떤 행동 때문에 갑자기 상대는 ‘탈갑변신을 한 박씨’처럼 전혀 다른 존재로 인식될 수도 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물리적 정신적 근거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이 정말 존재의 발견인지 내 병약한 기대의 투영인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이런 상황을 일반화할 수 있을까?


2. 결핍 충족에 대한 기대 VS 몰입의 발견


결핍의 자리에서 구원자를 찾는 사람은 관계 형성에 적극적이다. 자기의 부족함을 채워 줄지 모른다는 기대로 생성된, 타인에 대한 욕망은 때로 사랑에 대한 열정으로 오인되기 쉽다. 하지만 상대와의 관계가 형성된 순간 찾아오는 공허와 불안 – 나에게는 그를 채워줄 어떤 것도 없다는 자각-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테레자는 신분상승의 욕구로 토마시를 찾아갔고 결혼까지 했으나 자기가 버림받을 수 있다는 생각과 상대가 행복해하지 않다는 생각에 끊임없이 괴로워한다.


사랑을 느낀 이유였던 상대의 완벽함은 나의 낮은 자존감을 자극하고, 관계는 불안해지며 그 불안 때문에 우리는 관계 유지를 위해 자아를 소모한다. 사랑받기 위해 자신을 버리는 이 행위는 ‘헌신과 봉사’로 착각된다. 하지만 진정한 헌신과 봉사는 숨 쉬듯 자연스럽고 힘들지 않아야 한다. 헌신과 봉사로 인식되지 않아야 한다. 원치 않는 독서를 하고 혹독한 다이어트로 건강을 망치고 데이트 비용에 허덕이고, 유식한 척하고, 직업을 속이고 일반적이지 않은 취향에 당당하지 못하고 약점을 감추거나 드러내 악용하는 다양한 방어기제들이 모두 존재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에움길이다.


타인의 열정을 열망하고 타인의 기대를 기대하고 타인의 수준을 향해 달리는 것은 건강한 존재가 바라는 것일 리 없다. 특이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과 특이한 사람인 것은 다르다. 책을 좋아하는 것과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싶은 것은 다르다. <안나 카레리나>를 사랑하는 것과 <안나 카레리나>를 읽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것은 다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에서 테레자가  신분상승의 수단으로써 인식한 토마시에게 갈 때 출입증처럼 들고 간 것이 <안나 카레리나>였다. 그녀는 그것을 읽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연스럽지 않았다. 부자연스러운 취향을 본인 것인 양 하는 것은 누구를 위한 사랑인가. 친구나 연인이 나를 위해 엄청난 에너지를 쏟으며 검증되지 않은 열정을 낭비하는 것은 비극이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할 때는 더욱 그렇다. 당신은 당신대로 존재하라. 난 우리의 적합성에 감동할 테니.. 그것이 서로에게 덜 피곤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핍 충전에 대한 기대의 자리가 아닌, 어떤 자리에서 사람을 만나야 하는가.

 

나는 ‘몰입의 자리’라고 말하고 싶다.


팔로마와 르네, 오주는 급격히 서로에게 마음을 열게 됐다. 그것이 그들이 공유한 문화 코드 때문이었을까? 그러면 취향에 대한 공통 항목이 많으면 서로에게 좋은 존재인가?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삶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였다. 팔로마는 죽음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했고 매일매일 열정적으로, 자기를 살고 싶게 만드는 존재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하며 깊은 사색의 노트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 르네는 개인사를 겪으며 알게 된 지혜에 충실했고 이율배반하지 않으며 자신의 세계를 탄탄히 구축해 나갔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대충 넘어가지 않았다. 오주는 세상 모두에게 친절하거나 굽실거리는 나이스 가이가 아니었다. 그는 주거공간의 형태, 실내 장식, 비서, 가정부 하나하나를 고름에 있어서 신중하고 단호했으며 그들 모두에게 인간적이고 예의 바른 태도를 유지했다. 관심 있는 여자의 집 문을 두드릴 줄 알고 저녁식사에 초대하며 적합한 선물을 한다.


그들의 공통점은 삶의 태도이다.


취향이 있고 그것에 몰입한다. 그리고 타인의 시선과 기준 때문에 자학하지 않는다. 각자의 자리에서 뛰어난 업무능력(공부 포함)을 보여 주지만 결코 그 속한 사회에 종속되거나 휘둘리지 않는다. 그들은 그런 자리에서 서로를 만났다. 치열하게 자기 삶에 몰입하고 절망이든 희망이든 자기가 선택한 길에 진지하다. 누군가가 자기를 구원해 주길 바라며 레이더를 켜고 주변을 탐색하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왜 이것이 중요할까.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때로 타인의 기대가 버겁다. 매혹되는 눈빛도 탐욕으로만 느껴질 때가 있고 그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안다.


왜. 결핍은 타인을 통해 해결되지 않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공감과 발견이지 봉사와 헌신이 아니다.


존재에 최선을 다한 사람, 아니 자기의 추구하는 바를 놓치지 않고 몰입한 사람은 그 몰입의 과정과 결과로써 자신을 드러낸다. 억지로 음치처럼 노래할 수 없듯이 지성과 존재는 숨겨지지 않는다. 오주가 르네를 발견했을 때 르네는 정신이 혼미해진다. 구축한 성이 무너지는 것을 느끼며 고양이 레옹에게 말한다. ‘나는 가면을 벗고 싶은가 봐.’ 숨는 사람도 발견되기를 원한다. 자각시킬 누군가가 필요할 뿐이. 나를 반응하게 하는 너의 목소리에 언제나 귀 기울이고 있다.


그녀는 머리를 써서 전략적으로 오주를 꼬드기지 않았다. 외모가 아닌 지성. 그야말로 그녀 자신으로 존재함으로써 오주의 일상에 선물이 되었다. 팔로마는 수위실로 진입해 들어갔고 르네는 이 소녀와 ‘고요함’를 공유한다. 팔로마가 그토록 원했던 혼자 있고 싶은 공간. 이것이야 말로 르네 자신 아닌가? 이 셋의 공존은 아름답다.


각자에게 몰입하는 아름다운 시간, 고요함의 공유.


3. 아름다운 만남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움 그것은 적합성이다.] - 르네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지나가는 것을 우리가 포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건 우리가 사물의 아름다움과 죽음을 동시에 보는 순간에 일어나는, 사물의 찰나적인 배열이다.] - 팔로마


소설 전체에서 미학적 표현들이 많이 나온다. 언어와 음악, 영화, 미술 등등에 대한 인물들의 견해가 나온다. 난 생각해 봤다. 예술에 대해 왜 이렇게 많은 표현들이 나올까. 어떤 면에서 이들의 존재 형식이 예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찰나의 포착과 자신과의 적합성으로 아름다움을 이루는 만남에 성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일단 자기 삶에 몰입하는 사람조차 나는 별로 못 봤다. 그러니까 1에서 던진 질문들의 답은 거의 정해져 있다. 이 세 사람 같은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별로 없을 뿐 아주 없지는 않다. 그러니까... 한 공간에서의 찰나의 발견은 모두에게 적용될 수는 없으나 어떤 사람에게 는 적용될 수 있다.


나도 일반적인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공간에 가면 한 없이 평범하고 볼품없는 존재라는 것도 안다.


일반화된 타자로서 존재하는 공간에서 나라는 사람의 몰입하는 시간은 묵살된다. 그공간에서는 나 역시 르네처럼 위장술을 펼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 삶은 공장의 기계처럼 정형화되고 있고 그런 삶은 예술품으로 취급받기 힘들다. 많은 사람들이 적합함을 이루지 못하고 적당하게 타협하며 하루하루를 산다. 그것이 죄도 아니고 나쁘다 할 수도 없고 틀렸다 할 수도 없다. 하지만 예술적이진 않다. 아름답지도 않다. 아니 어쩌면 그것도 아름답지만 독보적이진 않다. 이 책은 취향이 확실한 독보적인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니까 아마도 모두에게 재밌게 느껴지진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난 많은 위로를 받았다. 54 세 정도 되면... 60 쯤 된, 내 암호를 알아듣는 아저씨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너에게 반응할 준비는 돼 있다.


몰입의 자리에서 만난 사람들의 데이트는 어떤 말과 어울릴까? 그 아름다움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 르네 아줌마의 말을 빌려 표현하면 이렇다.  


그건 시간 속에 있는 시간 밖이다... 나는 둘일 때만 가능한, 내맡기듯 감미로운 이 순간을 언제 처음으로 느껴보았나? 우리가 혼자일 때 느끼는 평온함, 고독 속 평정 속에서의 자신에 대한 확신은 은밀히 통하는 타인과 함께하는, 거침없는 마음의 가고 옴, 거침없는 이야기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언제 처음으로 남자 앞에서 이 행복한 휴식을 느껴봤나? 오늘이 처음이었다.

<고슴도치의 우아함 > ㅡ 르네의 독백


팔로마가 르네와 처음 차를 마시던 날 르네가 팔로마에게 말했다.


“아가씨는 멋진 은신처를 발견한 거예요.”


심장과 정신을 다 뒤집어 놓고 만신창이를 만들어 버리는 격정적인 사랑과 우정은 너무 피곤하다. 휴식과 은신처...  이것이 바로 관계의 적합함이 아닐까. 사랑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단 하나. 몰입의 자리에 있는 존재와 존재의 발견. 존재만을 요구하는 것.




만약 우리가 사랑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사랑받기를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아무런 요구 없이 타인에게 다가가 단지 그의 존재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사랑)을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7부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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