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책과 영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담 Aug 20. 2016

늙었다는 이유로 '가증'한 얼굴은  없다.

Aprilis의 독서일기 5-6 믿음의 수정과 합리화의 기로에서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 로렌 슬레이터

<나는 내가 제일 어렵다> - 우르 슬라 누보

<규원가> ㅡ 허난설헌


이틀 연속 각각 다른 반에서 허난설헌의 '규원가'를 수업했다. 솔직히 규원가는 금방 끝낼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도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수업했다. 허난설헌은 많은 작품을 남긴 조선시대의 작가다. <곡자>라는 시에는 어린 자식을 저 세상에 보내고 또 한 명의 자녀를 묻으며 뱃속의 아이마저 불행할 것만 같은 불안을 떨치지 못하는 슬픈 엄마의 마음, 가사 <봉선화가>에서는 손톱을 물들이며 설레 하는 여자의 마음, <규원가>에서는 '삼생의 원업과 월하의 연분으로 장안 유협 경박자'를 만났다면서 노골적으로 못난 남편을 원망하는 아내의 모습 그려진다.


의 남편백마 금 편으로 치장하고 기생집을 전전하면서 허난설헌을 외면했다. 배운 여자 허난설헌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그 시간들을 견뎠을까? 나는 학생들에게 질문했다.


이 가사가 정말 비극적으로 끝나려면 어떤 결론이 나야할 것 같니


많은 의견이 나왔다. 남자가 여자를 버린다.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 자살한다. 도망가서 가난하게 산다...  나는 대답했다. 가장 비극은 이런 남자인데도 여자가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상대를 한심해고 마뜩잖아하면서도 버릴 수 없다는 것이 이 여성의 비극이다.  <규원가>에서 허난설헌은 거부의 역사를 쓰지 못했다. 그녀는 가슴 절절히 아파하며 남편을 기다린다. 관계의 문제에서 가장 힘든 것은 치관과 상관없어도 떨쳐지지 않는, 존재에 대한 그리움과 미련이다. 가족, 연인, 친구, 동료, 누구에게나 그럴 수 있다.

허초희는 남매지간인 허균과 같이 공부했다. 똑똑했고 순종적이었다. 허균은 그 말로가 어쨌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다 갔다. 꿈이 있었고 추구했고 좌했다. 허균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소설을 남겼고 허초희는 손톱을 물들이며 사랑을 꿈꾸다가 원치 않던 '장안 유협 경박자'에게 시집가서 나이가 들어가며 얼굴이 못나지는 것을 슬퍼하고 자식이 죽는 것을 슬퍼하고 남편이 부재중인 현실을 슬퍼하는 사대부 여인의 삶을 남겼다.  수없이 많은 여인과 자유롭게 사랑하고 시대를 주무르며 천하의 모든 이와 교분을 나누었던 남동생 허균과는 너무나 다른 삶을 살았던 허난설헌이었다. 시집을 가기 전에도 시집을 간 후에도 이어졌던 허난설헌의 불행이 만들어낸 그 한의 기원은, 그녀의 약함 때문이었을까? 그녀의 똑똑함 때문 아니었을까? 


그녀의 지식과 사유가 그녀의 마음에 도움이 되었을까?


완군이 날카롭게 물었다. 이 여자가 정말로 남편을 그리워했을까요? 내가 답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낭만적인 그리움과 이 시절 사대부 여인들이 생각하는 그리움과 기다림이 같을까? 남편이 정말 버리면 쫓겨나거나 죽지 못해 살거나인데 여자의 삶이 남자에게 종속되어 있는 상태에서 그리움은 생존수단 아니었을까? 


어느 시대에나 낭만적 사랑은 존재했었다. 자상한 남편의 배려와 사랑 속에 행복하게 살다 간 여인들도 있다. 하지만 난설헌 허초희는 아니었다. 그녀에겐 그런 복이 없었다. 그 시대 똑똑하게 자기실현을 하면서 살려면 궁녀가 되거나 기녀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성적 욕망과 주변의 칭찬을 포기하지 않고 자기로서 살아가는 여성의 삶은 허락되지 않았다. 허난설헌은 자신의 생각으로 마음을 가두었든지 마음으로 생각을 가두었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했다. 인지 부조화가 일어났고 믿음의 수정과 합리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라는 게 있었는지 의문이다.


오늘날의 여성들은 다를까?
이것은 조선시대 여인만의 문제였을까?

<나는 내가 제일 어렵다>에는 수없이 많은 우울증을 겪는 여성들의 사례가 소개돼 있다. 허난설헌과 같은 일을 그녀들은 지금도 겪는다. 변한 것은 없다. 하나 더해졌다면 이제 그녀들은 일도 한다는 것이다.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5장 – 마음을 잠재우는 법에서 인지 부조화 이론을 다루면서 작가인 로렌은 말한다.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은 없다. 나는 이야기 중간에 끼여 있다. 어떠한 합리화도 정당화도 하지 않은 채 패러다임을 미결 상태로 내버려 두고 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조화와 부조화 사이에 매달려 침묵하고 있다. 평화롭다. 패스 팅거의 실험이 놓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조화와 부조화 사이.....]

일단 나는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는 마음에 들었고 <나는 내가 제일 어렵다>는 그렇지 못했다. 절대 주관적인 기준이다. 책은 문제가 없는데 나에게 도움이 안 됐다. <스키너의 심리상자 >는 중간지대를 허락한다. 소개는 하되 결론은 내지 않고, 결론이 난 것도 다시 까뒤집어 보여준다. 사라지고 잊힌 사람을 찾아내고 추적하여 다시 묻는다. 역대이래 가장 영향력 있었던 심리실험들을 소개하면서 우리를 생각하게 만든다. 자신의 고민을 드러냄으로써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냐고 소리 없이 묻는다.  난 그녀의 태도가 좋다.

<나는 내가 제일 어렵다 > 에는 우울증을 겪는 많은 여성들이 나온다. 폭력을 겪거나 외면을 당하거나 지나치게 소비당하면서도 상황을 개선시키지 못하는 여인들...  그들에게 전하는 좋은 내용이 많고 괜찮은 해석이 많은데도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의문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같은 자리를 뱅뱅 돈다는 느낌을 갖고 읽었고 그렇게 끝났다.


허난설헌이 자기의 처지가 왜 이렇게 됐는지 몰라서 그지 겨에 놓인 것이 아니다. 우울증을 겪는 여인들이 많고 그것이 무엇 무엇 때문이다라고 파 해치고 분석한다고 해서 그녀들의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둘러싼 환경이 비정상이면 정상이 비정상이 되는 법이다.

그녀들은 우울의 원인이 되는 대상을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사랑받으려 애쓴다. 상황이 그 지경이 된 원인이 그들 내부에 없고 보상받지 못하는 현실을 뜯어고칠 력과 책임이 그들 자신에게 없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다. 이것은 사회구조적 접근이 아니면 해결되지 않는 문제다.

이학에 치우친 중세 동양의 유학 질서가 서민을 억압하듯, 체제엔 문제가 없으니 네가 달라지면 된다.라는 식의 접근은 잔인하다. 그녀들은 인지부조화의 굴레에서 벗어날 의지도 능력도 없다. 설명하고 강요해도 아마 머무르고 싶어 할 것이다. '이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은 우울증을 겪는 여인들의 친구와 가족 애인과 남편이어야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똑똑하고 의지적이면서 우울감을 인식할 줄 아는 여성들에게는 도움이 안 되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 생각엔 작가는 ‘우울을 극심하게 느끼면서도 스스로 해결하는 여성’의 존재를 아예 모르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일부러 어떤 유형의 여성들만 다룬 것 같긴 하다.

나는 오랫동안 생각해 왔다. 심리치료가 정말로 인간을 변화시킬까에 대해서 그리고 꽤 많은 심리학자들과 치료사 정신과 의사들이 이 똑같은 의문을 품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융은 상처받은 의사가 치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상처를 아는 것과 상처를 아파하는 것은 다르다. 상처를 설명하는 것과 상처를 치료하는 것은 다르다. 심리학이라는 것이 심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다루고 생각하는 것에는 도움을 주겠지만 인간이 어떤 이론을 열거하고 방법을 외운다고 해서 치유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심리학이라는 것을 발전시킨 학자들 중에 ‘인간’보다는 ‘호기심’에 몰입된 사람이 상당했다는 것은 매우 역설적이다.


허난설헌에게는 사랑해주는 남편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녀에게 심리학 책을 가져다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많은 동양 철학서들이 이미 마음을 다스리는 데는 훨씬 유용했을 것이다. 그녀가 아무리 똑똑 해진들 주변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녀는 무언가를 선택했을 것이다. 첨예하게 주변을 인식하는 빛나는 지성을 끝까지 붙들었다면 그녀의 남편을 그리워하진 못했으리라.. 인식의 선택이 때로는 서글프다. 나는 규원가의 행간을 이런 상상으로 메꾸어 읽어본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 이상, 여인들의 인지부조화는 끊임없이 '믿음의 수정과 합리화'의 기로에서 갈팡질팡 할 것이고 다른 편이 만들어내는 합리화의 파도에 휩쓸려 우울감에 시달려야 할 것이다. 그래도 조금씩 늘어나길 바란다. 장안 유협 경박자와는 함께하지 않으리라. 사랑하지 않는다면 기다리지 않으리라. 안락함을 기꺼이 거부하는, 빛나는 우울감을 별처럼 달고 살아갈, 자아를 놓치지 않을 여인들의 이야기가 이제는 세상을 전복하길 바란다. 지금 태어난 허초희들은 그래도 된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늘어 얼굴이 '가증'해졌다고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 허초희는 그러지 않을 수 없었지만...


두 책의 작가 모두 심리학을 공부한 전문가이고 둘 다 베스트셀러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느낌이 다른 이유는 문체에 있는 것 같다. 로렌은 문학적 글쓰기로 책을 엮어내어 많은 몫을 독자에게 넘겼고 우르슬라 누보는 여백을 주지 않았다. 난 내 몫을 남겨주는 책이 좋다. <침묵의 봄>이나 <아직도 가야할 길> <행복의 조건>이 그랬듯 서사적 글쓰기의 능력이 학자들에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새삼 느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를 반응하게 한 너의 한 마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