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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담 Oct 21. 2016

따뜻함. 단념하기 쉽지 않은 꿈

Aprilis 의 독서일기 7 - <담요> 크레이그 톰슨



1. 그래픽 노블이 무엇일까

이 책을 읽기에 앞서 여기저기서 조금씩 그래픽 노블을 접했었다. ‘호러 무비’가 그렇듯 ‘그래픽 노블’또한 아직 정의되는 과정인 것 같다. 지인이 이 장르에 대한 전문적인 글을 쓰셨다고 했는데 그 글을 읽기 전에 먼저 내가 느낀 대로의 정의를 내리고 싶어서 아직 안 읽어봤다.


일반적으로 소설이라고 하면 구성과 문체가 어우러져 주제를 잘 형상화한 허구의 글이라는 뜻이다. 구성은 인물과 사건 배경으로 이루어지고 이것이 문체를 통해 아름답게 형상화되어야 예술성을 인정받는다. 만화 작품들 중 몇몇이 그래픽 노블이라고 분류되는 이유는 아마도 만화 중에서도 구성과 문체의 긴밀성과 견고함을 인정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일반적으로 만화가 연재 형식의 단편이 합본된 경우가 많다 보니 스토리는 탄탄한데 비해서 배경과의 긴밀성은 약한 경우가 많다. 스토리가 길게 전개됐음에도 불구하고 계절이 변하지 않는다든가 인물들이 나이를 먹지 않는다든가... (대체적으로 그런 경우가 많다) 배경이 하는 다양한 역할 중 일부분만 강조되어 쓰이는 경우도 있고 이야기의 상징성이 배경과 만나 시너지를 내는 경우도 흔하지는 않다. 아마도 전체 구성에 대한 접근이 소설과는 좀 다르게 시작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것이 내 추측이다.


이 작품밖에는 아직 안 읽어봤지만 일단 <담요>의 구성은 매우 탄탄해서 마치 한 편의 시를 읽는 것만 같다. 이 작품에서는 시간, 공간, 시대, 지역, 자연... 등, 다양한 배경이 인물의 심리와 얽혀 거의 한 몸처럼 움직인다. 그의 성장에 모든 인물과 배경이 영향을 끼치고 각각의 에피소드는 하나의 그림을 위한 퍼즐이 된다. 퀼트 담요를 구성하는 조각천처럼...


그래픽 노블에서는 화면의 구성과 그림이 소설의 문체 역할을 한다. 소설 이론에선 서술 묘사 대화가 문체를 이룬다고 말한다. 여기에도 그 모든 것이 있다. 나에겐 그랬다... 선의 굵기와 음영이 문체처럼 섬세하게 느껴졌고 많은 서술을 대신했다. 묘사와 대화... 이건 원래 만화가 잘 한다.


2. 크레이그가 떠올려 주는, 우리의 겨울


그를 둘러싼 배경은 가혹하다. 유독 많이 등장하는 추운 겨울과 눈, 밤, 골방, 어둠, 동굴은 어린 주인공의 심리가 어떤지를 반복적으로 암시한다. 이야기에 빠져들수록 내가 잊고 있던 어둠과 추위의 기억이 점화되고 나는 오한을 느낀다. 교회, 학교, 가정, 침실... 그를 가르치고 보호하고 위로하고 휴식이 되어주었어야 할 모든 기관과 장소에는 억압과 폭력이 있었다. 모든 것의 답은 정해져 있고 크레이그의 취향과 의문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오직 복종과 타협을 통해서만 평화를 허락받는다. 옳은 것과 좋은 것은 정해져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우리를 상처 입힌다. 익숙한 공간은 답답하다. 상상력이 없는 평화는 모든 개선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때때로 안정감은 억압으로 변질된다. 사랑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사랑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행동만 반복한다. 모든 것의 정답이 정해져 있고 해결책도 정해져 있다. 이것이 어른과 학교와 교회의 폭력이다. 사랑과 윤리와 신의 이름으로 그들은 순수하고 독보적인 존재들에게 엄청난 폭력을 행사한다. 그들이 제공한 것은 값싼 편의였을 뿐, 소통한 적은 없다. 답답해하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거나 배척하거나 불쌍히 여기며 배척한다. 크레이그의 삶은 그런 환경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렇게 그 모든 배경들이 이 존재에게 겨울만을 제공했다.

내 감정과 행동에 대한 선택을 주입하고서 자유의지를 논하는, 모순된 그들의 한기



3. 내가 한 것은 사랑이었을까


장소는 인물을 결정한다. 그런 곳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은 모두 그런 장소를 닮았다. 그는 그 장소들의 폭력을 감내한다. 좋아하지도 않지만 의문을 품지도 않는다.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이미 그는 배경이 돼 버린다. 이쪽도 저쪽도 크레이그와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그 장소에서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나를 닮은 것만 같은’ 레이나를 만난다. 레이나와 크레이그는 그렇게 만났다. 배경만이 존재하는 반복적인 공간 속에서 유일한 전경으로서 ‘대화’를 시작할 첫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이제 눈밭에 누워도 춥지 않다. 여전히 겨울임에도...


사랑에 빠지면 뮤즈를 얻는다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그 사람은
정말 내가 생각하는 사람이었을까
그가 나에게 준 마음과 행동은
정말 사랑이었을까.


사랑받고 싶다는 욕구보다 사랑하고 싶다는 욕구가 강할 때가 있다. 내 마음과 정성과 순수함을 모두 쏟아부어도 좋을 누군가를 향한 강한 충동. 그리고 그 마음에 대한 확신... 혼란스러운 현실로부터 나를 차단시킬 강한 열망...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겨울'이다. 아무나 고르진 않았지만 꼭 너여야만 하는 이유를 잘 모른 채 시작된 간절함. 너는 나를 구원해 주지 않을까라는 '상상'은 나를 비약적으로 변화시킨다. 하지만 그것이 사랑이었을까. 겨울이 아니었다면 난 너에게서 따스함을 찾았을까? 이 겨울 속에서 영원히 봄 대신 따스함을 욕망할 수 있을까? 

어차피 그것은 상대적 따스함일 뿐이다. 봄조차도 길지 않은데... 너의 따스함은?


4. 동굴 밖의 세상


이 책에는 소크라테스의 동굴 우화가 나온다. 이야기의 마지막과 우화의 교차는 너무나 아름답고 온전하다. 때때로 우리를 교육한 이들은 우리가 학습능력이 있다는 것을 잊는다. 아주 소수의 사람들은 학습하고 습득하고 적용하여 문제를 해결한다. 노예가 정말 인격이 없을 것이라는 오만은 주인을 노예가 되게 한다. 오만한 주인은 이미 자격을 잃은 것이다. 크레이그는 이 우화를 발전시킨다. 그는 배운 모든 것을 흡수했고 그것을 통해 노예가 아닌 자유인이 된다. 그는 이 단어를 떠올린다. thaw... – 그의 겨울은 끝장이 났다. 그러면 그 겨울 너무나 따스하고 소중했던 그대는 어떻게 되는 거지?

겨울이 끝나면 따스함은 쓸모가 없다.


‘가끔 눈을 뜨면, 방금 전에 꾸던 꿈이 현실보다 더 매력적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단념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 - <담요> 중


케이크가 아무리 달콤해도 처음 내 입에 들어가게 할 땐 용기가 필요하다. 주변의 울타리가 사랑인지 억압인지는 떠나본 사람만이 안다. 나의 탈출구가 오직 너뿐일 것만 같은 불안감은 나를 영원히 노예로 머물게 하지만... 정말 네가 구원이었는지는 떠나 봐야 아는 것이다. 경험하지 못한 모든 것이 공포일 정도로 나는 그렇게 못났었다. 겨울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봄을 맞이한 사람의 마음을 더 이상 덥힐 수 없는 그대라면 더 이상 뮤즈일 수도 없다. 나를 얼어붙게 했던, 나를 억압해온 보호막들이 사라지면 그림자가 아닌 실체만이 영감의 원천이 된다. 나는 이제 그 동굴을 떠났다. 나의 환경은 이제 봄이다. 나의 뮤즈 당신에게도 봄이 오기를... 하지만 그대의 봄은 그대의 탈출로부터만 시작된다. 이제 나의 겨울은 몇 개의 무늬- 그림자를 남긴 조각들이 되었다.


 5. 나의 '담요'

난 갈등과 공허가 공존하는 어느 일요일 오후에 이 책을 읽었다. 심장은 쿵쾅거렸고 오한이 났고 슬펐고 아련했다. 그리고 신기했다. 크레이그가 겪은 거의 모든 것을 내가 겪었다. 담요에 담긴 이야기는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억압과 강요 타협 없는 신성불가침의 폭력과 그로부터의 탈출을 경험한 모든 사람의 이야기다.


공허한 찬양의 시간, 사유 없는 유머와 근거 없는 확신이 가득한 설교, 무리 지어 그 공고함을 자랑하는 분파들, 공기보다 가벼운 위로와 눈물... 공감 없는 세련된 형식들, 교리로 둔갑한 각자의 추측들, 지적 각성, 두려움, 망설임, 금기에 대한 억압, 못된 친구들, 안 못됐는데 바보 같은 친구들, 폭력적인 어른들, 영원하지 않았던 관계, 섣부른 고백, 이제는 이해가 되어 미워할 수 없는 과거의 상처들, 장애가 있는 가족, 추운 겨울 자매와의 이불 싸움, 가혹한 벌, 인정받지 못한 재능, 주목받지 못하는 개성, 기대와 실망, 작은 도시에서 큰 도시로의 이동... 너무 하찮았던 이야기들이 <담요>를 통해 특별해진다.  


크레이그는 자기에게 겨울이었던 모든 것을 떠난다. 그리고 그로써 동굴을 벗어난다. 하지만 담요만큼은 버리지 않았다. 하찮은 것 같고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모양과 색의 천이 한 데 어우러져 만든 조각이불... 나에게 상처를 줬든,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과거가 됐든 내가 거쳐 온 그 모든 시간들은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나의 역사다. 부정할 수 없는 나의 일부. 더 이상 영감의 원천이 아닌 나의 뮤즈도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있다.


크레이그의 문체와 고민에서 난 그가 받았던 교육과 억압이 무엇이었을지를 깊이 느낀다. 그리고 그가 무엇을 떠났고 무엇을 가져갔는지를 알겠다. 겨울이 끝났다고 해서 나에게 겨울이 있었던 것을 억울해할 필요는 없다. 그냥 내 담요 위에 무늬 하나로 예쁘게 남을 일인 것이다. 기억해야 한다 크레이그는 강요받았던 모든 것을 지켰었다.  그는 게으른 노예의 이야기를 쓴 것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주인을 사랑하고 열망했던, 그래서 욕망을 억압했고 본질을 꿈꿀 수 있었던, 충직한 노예의 용감한 탈출기다.



6. 왜 그래픽 노블인가


어떤 장르이건 탁월함과 저급함이 공존한다. 새롭게 자리매김하려는 이 장르도 아마 그럴 것이다. 인류가 무엇인가를 전수하려고 결심한 이후, 이야기는 다양한 미디어를 거쳐서 발전해 왔다. 이야기는 신화 전설 민담을 거쳐 소설이 되고 연극이 되고 영화가 되고 이미지가 되고 다시 소리가 되기도 했다. 소설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우리가 지켜내려고 하는 아름다운 이야기와 날카로운 지혜들은 갈수록 가독성이 떨어지는 신종 인류에게 적응하기 위해 새로운 미디어를 선택하려 할 것이다. 언제나 그래 왔듯이...


난 그래픽 노블이 그런 면에서 중요한 장르라고 생각한다. 아류에 그치는 작품들도 양산될 것이 당연하지만, 그래픽 노블이 이야기의 생존을 위해서 꽤 괜찮은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고전의 그래픽 노블화 작업이 이루어진다면 어쩌면 차세대가 아닌 현재의 20대나 30대에게도 열광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난 그것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확실히 현 인류는 시각화에 민감하고 점점 이미지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발달시키고 있다. 거기에 걸맞은 과도기적 장르의 출현은 필수적이다. 지금은 소설의 겨울 인지도 모르겠다.

 




그대가 주는 따스함 때문에
이 겨울을 붙들고 있진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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