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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담 Aug 25. 2017

나의 파이, 나의 리차드 파커

Aprilis 의 독거 에세이 8 ㅡ 프리랜서 인문학 강사의 생존기

광화문에 있는 외국계 은행에서 기업 강의를 하고 왔다. 학생 대상이든 일반인 대상이든 주로 교육기관에서만 강의를 해왔기 때문에 강사로서의 다른 입장에 대해 좀 고민을 했었다. 나의 자리에 누군가가 찾아오는 것과 어떤 집단에 내가 찾아가는 건 경우가 완전히 다르다. 후자의 경우 강의에 대한 청중의 기대가  아예 없을 수도 있다. 스키마 설정이 애매모호해서 청중 분석이 안 된다. 평소 나는 학습자 요구가 매우 높은 환경에서만 강의를 한다. 북클럽에도 책임의식이나 자기실현의 욕구가 높은 사람들이 모이는 편이고 학원에서 일을 할 때나 과외를 할 때도 일정한 과정이 시작되기 전에 학습자의 선택과 자세를 거듭 확인한 다음에만 교육을 시작했었다.


기업 강의는 그런 환경이 아니다. 뭐랄까... 경호를 원하지 않는 톱스타에게 경호를 해 줘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경호원의 느낌이랄까. 상대가 필요를 정확하게 알든 모르든 나는 정확하게 필요한 것을 정해서 생각지도 못한 교육 효과를 내야 하는 것이다. 내가 균형을 잘못 잡으면 장소만 바뀌었지 학원 시절과 다를 것이 없어진다. 하지만 학원 생활을 하면서 내가 배운 중요한 한 가지는 장소는 큰 영향을 끼치긴 하지만 결정적 조건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성인들은 좋은 교육 콘텐츠만 좋다면 민감하게 반응한다. 알아볼 줄 아는 눈과 경험이 있다. 악조건은 선조건이 되기도 한다. 입시 공부를 하는 학생들도 본질적인 문학과 철학을 접했을 때 그것을 즐기고 활용할 줄 알았다. 사회인들은 어떨까.


기업 강의를 하면서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각 분야의 엘리트들이다. 각자의 분야에서 자신이 유능함을 입증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에겐 업무 외의 문제들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고 바라볼 시간적 여유가 없다. 그리고 지속되는 일상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꿈꾸었던, 유유자적하며 지혜를 생산해내는 '소요 학교'와 같은 환경이 죽을 때까지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는 인문학마저 하나의 생존 도구로써 요구하고 주입을 시도한다. 그리고 난 그 사이에 끼어있다. 인문학을 하되 소비도 돼야  한다. 순진하기만 하면 낙오된다. 인문학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과 행복하게 살려면 난 낙오되면 안 된다. 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살아가는 것을 훈련하고 실천하기 시작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

내가 인문학적 사고의 방법을 가르쳐 줌으로써 주체가 스스로 읽고 분석하고 결정하며 살 수 있도록 돕자는 결심을 하고 이 일을 시작한 이후 1년 몇 개월이 지났다. 요즘 내가 깨달은 것은 내가 자꾸만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만 내 말이 사실이 된다는 거였다. 공부만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개인의 문제가 관계의 문제로 관계의 문제가 사회의 문제로 확장되어야 한다. 내가 맺는 관계가 내가 사는 세상이 된다. 모든 관계는 선택의 문제였다. 문제 해결도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기업 강의는 그래서 하기로 했다. 순진한 사람들이 모여서 세상 편한 소리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삶을 통해 입증해야 하고 인문학은 실제적이라는 것을 나 자신에게 반드시 보여줘야 했다. 먼저 나 자신에게 이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나 역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이니까.


얀 마텔의 소설 <파이 이야기>에서 인도 소년 파이는 캐나다로 이민하던 항해 중 조난당해서 태평양에 혼자 남겨졌고 조난 당시 뱅골 호랑이를 구해내 함께 살아남는다. 조류와 날씨의 도움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파이가 살아남는데 결정적이었던 생존전략은 '호랑와의 동거'였다. 호랑이 없이, 신을 사랑하는 순진한 인도 소년의 정체성만으로 태평양에 도전했다면 파이는 죽어버렸을 것이다. 호랑이는 구명보트에 남은 맹수를 대신 죽여줬고 채식주의자 파이는 호랑이와 살아남으려고 바다거북도 죽이고 물고기도 죽인다. 나중에는 좀 덜 지루하려고 물고기의 눈을 찌르는 유희도 개발한다. 파이는 계속해서 기록한다. '리처드 파커를 먹여 살려야 해. 리처드 파커를 위해서야. 난 리처드 파커를 사랑해.' 파이는 사랑하는 리처드 파커와 태평양을 건넌다. 그리고 육지에 도착했을 때, 리처드 파커라는 이름의 호랑이는 뒤도 안 돌아보고 파이를 떠난다.


물고기를 잡고 거북의 목을 따서 거북의 피를 마시는 파이처럼 나는 피피티를 작성하고 마케팅에 대한 책을 읽고 사업자들을 관찰한다. 그리고 우주와 바다 가운데 띄운 조그만 구명보트에 있는 파이의 기분을 상상한다. 희망 없는 파이를 위해 신은 있어야만 한다. 리처드 파커에게 파이가 있어야만 하는 것처럼... 파이는 때로 서럽게 운다.  신의 실제는 믿음뿐이다. 파이는 신을 사랑하는 정체성을 버리지 않는다. 하지만 자기도 안다. 이제 거북의 피는 달콤하고 사슴고기의 맛은 너무나 유혹적이라는 것을... 파이는 캐나다에 정착한다. 그리고 캐나다에는 리처드 파커가 없다. 육식의 기억은 잊힌다. 파이에게 리처드 파커와 태평양의 신화는 '일시적'이다.


강의가 시작됐을 때, 태평양에 처음 던져진 파이처럼 나는 용감하지만 겁이 난다. 아... 지금 목소리 떨리잖아. 아... 호흡이 가쁘네. 그러다가 그를 소환한다. 맹수와 싸워주는 나의 리처드 파커. 나의 훈련된 생존 기술이 나를 휘감는다. 그리고 나는 태평양을 건너기 위해 연마한 모든 기술을 시연한다. 사람들과 눈을 맞추고 그 사람들의 마음의 결을 느낀다. 그다음엔 모든 것이 순조롭다. 끄덕거림과 몰입과 질문과 대답. 그리고 늘 하듯이 모든 시선과 생각의 가닥이 하나의 묶음이 된다.  이곳에서도 나는 여전히 파이다. 리처드 파커에게 장악당하지 않은 리처드 파커를 먹여 살리는 인도 소년. 그리고 그곳에 있었던  나의 이야기를 듣던 많은 리처드 파커와 소년들. 나는 바다를 건넌다. 사람들도 물고기를 낚으며 호랑이를 먹이며 바다를 건넌다. 나의 이야기는 살아남는다. 이야기는 매력적이다.

북클럽을 유지하고 진지하고 편안한 긴긴 이야기를 나누고 수업료를 높게 부를 수 없는 대학생을 계속해서 가르치고 계속해서 철학과 문학을 연구하기 위해서 난 돈을 벌어야 하고 나를 팔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세련된 옷도 입어야 하고 말투를 교정해야 하고 때때로 비합리적인 대화를 해야 한다. 그것도 내 모습이고 이것도 내 모습이다. 언젠가는 어떤 모습은 나를 떠나겠지. 서로가 서로를 먹여 살리다가 언젠가 어떤 자아는 안녕을 고한다. 남는 것이 파이일지 리처드 파커일지는 과정이 결정하는 것이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 역시 모두 태평양 한가운데서 열심히 물고기를 잡고 있고 각자의 호랑이를 키우고 있을 것이다. 때로는 잔인한 호랑이를 사랑하게 된다. 보트의 주인이 호랑이인지 파이인지 혼란스럽다. 각자가 정박시킨 보트에서 누가 내릴 것인가. 종착지에서 마주치는 것이 호랑이라면 한 마리의 호랑이만 남을 것이다. 종착지에서 마주치는 것이 인도 소년 파이라면 모든 소년이 함께 살 수 있다. 


육지에서 만난 누군가가 포식자인 호랑이가 아니길 바라며 나는 한 시간짜리 기업 강의도 인문학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보는 것이다. 겨우겨우 시간을 내서 앉은 바쁜 사람들의 한 시간이 헛되지 않도록 노력하며 그들이 가장 유능한 조련사이길 바라며 호랑이에게 먹히지 않길바라며 호랑이를 먹여 살리는 방법을 말하면서도 소년으로 살아남자고 설득해보는 것이다. 설득에 성공한 이야기는 살아남는다. 나는 오늘도 이 소설의 한 구절을 속삭여본다.


이 이야기는 해피앤딩이다.


북클럽 오후 세 시의 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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