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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담 Aug 30. 2017

약이 없는 밤, 약이 없는 사랑

Aprilis의 독거 에세이 9

어제부터 심상치 않던 목이 자꾸만 부어오른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서둘러 자리에 누웠지만 앓고 지나가야 끝나겠구나 싶다. 좀처럼 잡지 않는 오전 약속이 걱정되어 잠이 안 온다. 몇 개월을 미루다가 잡은 약속이다. 취소하기 힘들다. 자리에서 일어나 며칠 전 만들어 놓은 생강차를 끓는 물에 희석시키고 약상자를 뒤진다. 타이레놀 한 알이 나온다. 이름도 용도도 모르는 약봉지가 수북하다. 내일 약국에 가져가 물어보고 버려야겠다. 내일 병원에서 링거를 맞아야겠다. 방으로 돌아와 잠을 청해 본다. 목이 자꾸만 아파온다. 열감이 느껴진다.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끓인다. 며칠 전에 만들어 놓은 생강차를 마시고 타이레놀을 삼키며 몇 시쯤 잠이 들지 가늠해 본다. 요즘 나는 자꾸만 잠들기를 유보한다. 잠들기 전까지 계속 뭔가를 들여다봐서 눈이 나빠졌다. 완전한 침묵 속에서 휴식할 수는 없을까. 몇 년 전 심한 빈혈을 앓을 때 그런 적이 있었다. 그땐 정말 머릿속이 텅 빈 느낌이었다. 아무리 자도 잠이 왔다.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칼이 그대에게 있음을 안다. 하지만 이 서사를 피해자의 기록으로 남기고 싶지 않다. 고통을 다루는 능력을 배우기 위한 과정 속에 그대 역시 나에게 소비됐음을 인정하고 이 모든 과정을 내가 인지하고 선택했다고 기억하고 싶다. 그것이 우리의  고통의 기억이 준 선물이고 전투력이고 사랑의 기록이었다고 난 결정했다.

브런치에 들어와 쓰다 만 메모들을 뒤적여본다. 작년 언제인가 썼던 글이다. 누구를 생각하며 썼는지 기억이 안 난다. A인가 하며 읽고 있는데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난 A를 사랑한 적이 단 한순간도 없다. 누굴까. 저런 결정을 하게 한 그는... 내가 쥐어준 칼을 회수당한 후 나와 비슷한 기록을 마음에 새겼을까. 그 칼을 나에게 휘둘렀을까. 지나 보면 기억도 안나는 관계 때문에 매번 참 살뜰하게도 아파했던 것 같다. 그런 나는 점점 없어진다. 그런 나는 혼자 사는데 별로 도움이 안 된다. 그런데 글을 쓰거나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할 때는 도움이 된다. 난 그 중간에서 서성거린다. 뭐가 맞는지 고민하게 되는 일이 점점 늘어난다.

 

오늘 책 모임에서 사랑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한때 정말 사랑했다고 믿었는데 지나고 보니 전혀 사랑한 것이 아니었던 관계가 생각보다 많았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런 감정에 대한 죄책감을 덜려고 시도한 일종의 기만이 아닐까. 잠시 동안 앓는 정신 질환이 아닐까. 나에겐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사랑했음이 분명한 관계는 한두 명이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당시가 아닌 모든 시간 대에서 부정된다. 당시에 필요에 의해 성립된 관계가 일종의 죄책감 때문에 미화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엔 진심이었다. 난 의지가 강하니까 모든 약속과 결심을 지켰을 것이다. 내 진심을 깨닫는 것은 상대방이었다. 아마 사랑하지 않을 것을 알았을 것이다. 난 성실하기만 했다. 불균형하구나 나는. 지금에야 좀 깨닫는다.



다음날

병원에 다녀왔다. 내과의 선생님은 너무 많은 약을 처방해 주셨다. 약 때문인지 링거 때문인지 감기 기운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그래도 약을 먹어야겠지... 내과와 정형외과의 전혀 다른 태도를 가진 두 선생님을 보면서 자아를 고르는 행위에 대해 생각해 봤다. 퇴직 후 나만의 일을 하면서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자유로움이었다. 그 자유는 민주적이지 않았다. 아마도 사회가 그렇게 만드나 보다. 그래서 나는 항상 갈등해야 했다. 난 어떤 자아를 데리고 살아야 하나... 그러다 보니 어제 책 그룹에서 사랑에 대해 나누었던 얘기가 생각난다. 지적 성찰을 통해서 논리적으로 무엇을 알게 되는 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끔 나는 책을 읽고 알게 된 깨달음이 나의 현실과 너무 달라서 슬프다.


우리는 우리의 언어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른다. 본인의 생각이라며 말하는 것조차도 타인의 시선을 상상하여 편집한 것일 수 있고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기준 없이 선택 없이 설정되어 있을 때가 많다. 왜, 어떻게, 라는 질문을 듣는 순간에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나를 떠나보지 않고서 나를 안다는 것이 가능할까. 내가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이 무엇인지 내가 실망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나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너는 누구니'
.
.
.

제자가 나에게 사랑이 뭐냐고 묻길래 알았다. 그것조차 더 이상 나에게 특별한 단어가 아니라는 것을... 이것이 의미 있는 각성이 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실망의 시간이 있었으니 세상에 의미 없는 경험은 없다. 의미를 못 찾아내는 내가 있을 뿐... 네가 생각하는 사랑이 너의 사랑이고 나에게는 사랑을 위한 별도의 정의가 없어. 사랑을 예찬함으로써 사랑을 욕보이고 싶지 않다. 나에겐 그냥 일상이든가 아니든가...라고 대답했다.

2016. 8월

아까 집에 와서 하루를 정리하면서 얇게 저민 생강을 꿀에 담가 만든 차에 마른 대추를 더 넣었다. 먼저 깨끗이 씻고 건조시키고 씨를 발라내고 깔끔하게 발라진 살을 부엌 가위로 얇게 잘랐다. 그리고 꿀을 더 부었다. 저민 생강과 말린 대추를 팔팔 끓인 물에 타서 마셨다. 나에겐 약국의 약보다 효과가 좋은 감기약이다. 돌봐줄 가족이 없이 혼자 살면서 만들어낸 긴급 처방이었다. 이게 무슨 소용이 있지? 하면서 받아온 엄마의 생강과 대추가 냉동실에 처박혀 있다가 정말 응급 상황으로 아팠던 어느 날 큰 도움이 됐었다. 양파 껍질과 씻어서 말려놓은 대파 뿌리가 있으면 더 좋다.


관계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도 그런 것 같다. 처음엔 꿀, 그다음엔 생강과 대추, 파뿌리...  그다지 신경 쓰고 살지도 않았고 중요한 것도 아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일이 닥쳤을 때 급하게 꺼내어 팔팔 끓여서 소망을 담아 마시는 생강차 같은 것이다. 어느 구석에 있었다가 튀어나왔을지 모르는 구닥다리 생각과 신선한 최근의 성찰과 누군가가 주입하듯 심어놓은 생각이 막 섞여서 나만의 사랑 또는 우정 또는 양심이 되어 나에게 스며 정체성이 되어 버리는 것. 정말 중요한 것이 뭔지 알지만 그때는 여의치 않아서 내 것으로서 갖추지 못하고 사람을 대할 때도 있고 정말 내가 좋아하는 생각이 아니었는데 급해서 우선 주워 삼켰다가 다음 기회에 빼버리게 되는 생각도 있고... 망한 걸 알지만 돌이킬 수 없어서 버려 버리는 그리고 그때 중요했던 다른 것들도 다 버릴 수밖에 없게 되는 것... 어느 순간에도 이렇다고 정의할 수 없고 지나 보면 다 거짓말 같고 정의하는 것보다 내 것이 되게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그래서 일단 이것저것 다 섞어서 달여 마시게 되는 것. 약이 없는데 아픈 밤이 그렇듯 뾰족한 수가 안 나는 관계가 있다.


혼자 사는 나는 사람들과 만나서 책에 대한 얘기를 하고 나의 생각의 결을 점검받고 감시받고 확인받는 시간이 너무 중요하다. 그때 내가 한 생각을 누군가가 이해하는지 반박하는지 비판하는지 확장하는지 살펴보면서 정말 좋은 재료가 무엇인지 식별할 능력을 키우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면 제대로된 처방전을 쓸 날이 올지도 모른다.


어떤 친구와의 깨진 관계에 대해 아주 작은 부분을 전해 들은 어떤 친구가 나를 위해 말해줬다.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인 걸로 하죠.

내가 대답했다.

나쁜 부분도 있는 사람인 거죠.

나도 안다. 나쁜 사람이다. 그런데 동시에 좋은 사람이다.

난 그렇게 이런 일들을 건조하게 볼 수 있게 됐다.

그래서 덜 괴롭다.

그리고 덜 괴로워하게 된 내가 조금 허전하다.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이 생강차의 질에 대해. 이번 감기는 며칠 앓아야 지나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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