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하러 가려고 버스를 탔는데 뒤쪽에 마땅한 자리가 없어서 운전석 바로 뒷자리에 앉았다. 창쪽에는 인조 밀짚모자를 쓴 마른 체형의 중년 여성이 앉아 있었는데 다리를 편하게 좌석에 펼치고 있으셨다가 내가 앉으니까 서둘러 자리를 내주면서 가방을 치우셨다. 나는 카라가 넓은 흰 블라우스에 배낭을 메고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었는데 이 여성분이 계속 뭐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 같아서 한쪽 이어폰을 뺐다.
"아유 난 옷을 보고 학생인 줄 알고 '미안. 미안.' 하면서 반말을 했네.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교복인 줄 알았어요."
"아. 하하. 네. 이 옷이 좀 그렇죠..."
아주머니는 무언가 말을 계속하셨다. 운전석 뒤의 투명 플라스틱 벽에 비친 우리를 보면서 저거 봐요. 학생 같지. 난 학생인 줄 알고... 말을 계속하실 것 같아서 이어폰을 빼서 가방에 넣었다. 네. 네 하고 듣는데 뭐라고 마땅히 대꾸할 말을 찾지는 못했다. 그냥 앉아서 가는 동안 잠깐 서로의 신발이 닿았는데 얼른 발을 자기 쪽으로 치우시면서 내 발치를 내려다보셨다. 그 물끄럼한 시선이 느껴지는데 염탐하거나 무례한 느낌과는 다른 어떤 몰입감이 느껴졌다. 날 본다기보단 생각에 빠진 것 같이 보였다.
난 사람의 언어적 비언어적 표현을 읽어내서 바로 반응하는 것이 직업이다. 직업적인 반응으로 분석을 해서 그랬는지 설명하기 힘든 촉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실례로 느낄 수도 있는 이분의 말과 시선과 행동을 뿌리치고 싶은 기분이 안 들었다. 나도 모르게 그분의 시선을 따라 반바지 아래로 드러난 내 드러난 허벅지를 바라봤다. 원래는 허여멀건 살결이 햇볕에 약간 그을려 있었다. '언제 이렇게 탔지...'
"빛이 곱다."
"네?"
"얼마나 이뻐. 다리가 아주 건강하네."
그제야 이분의 다리를 봤다. 검고 헐렁한 바지를 입은 이분의 다리는 정말 가느다랗고 힘이 없어 보였다. 그때 그분이 갑자기 바지를 걷었는데 무릎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굵은 수술 자국과 함께 앙상한 다리가 드러났다. 그분이 말씀하신 이쁘다는 표현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쓰는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내가 퇴행성 관절염이 온 다음에 어느 날 넘어지면서 다리가 아예 나가 버렸어. 그땐 아예 걷지도 못했어. 무릎에 인공 관절을 넣었는데 적응하는 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다리가 힘이 하나도 없어. 이렇게 다리에 근육이 붙고 건강하니까 얼마나 이뻐. 난 정말 재활하는데 너무 괴롭더라고. 너무 우울했어."
몇 년 전에 학원에서 일할 때 이런저런 상황이 겹치면서 어깨에 문제가 생긴 적이 있었다. 가느다란 밴드 하나 벌리는데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플랭크 자세로 10초도 못 버티고 옷을 입거나 벗는 것도 힘들었었다. 그리고 어깨 문제로 2년을 고생했다. 심리적으로도 약했고 육체적으로도 바닥이었다. 평생 그런 육체적 나약함을 겪어본 적이 없었던 나는 그 상태가 지속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우울감을 떨치지 못했었다. 그리고 최근엔 운동을 하면서 무릎 염증도 겪었었다. 몸이란 것은 그냥 쾌적하지 않으면 고통이다. 몸이 있다는 것을 못 느낄 정도로 건강하지 않은 이상 어느 한 부분이라도 불편하면 일상이 괴롭다.
나는 이분이 왜 날 붙들고 이런 말을 하는지 왜 그냥 내가 앉아만 있는데도 내 발목과 무릎과 허벅지와 내 건강함만으로 상념에 잠기는지 이해가 됐다. 그 우울과 불안을 덜어주지 못하는 게 약간 서글펐다. 동병상련을 느껴서인지 정말로 난 그런 감정을 느꼈다. 혼자 사시는 걸까. 왜 이 말이 나에게 쏟아질까. 받아주는 사람이 일상 속에 있으면 이러지 않을 텐데 어떻게 내가 이 말을 들어줄 것을 알았을까. 이분은 어떤 환경과 맥락 속에 자신을 단련해 오신 걸까. 그때 그분 얼굴을 봤다. 상당한 미인이었다. 그분의 눈매와 눈동자와 콧날은 굉장히 새련된 이목구비를 이루고 있었다. 실례일 수도 있는데도 난 그분이 아름답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런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도 나에게 일종의 부러움을 표현하는 그분에게 어떤 긍정적인 반응을 해주고 싶었다.
"정말. 세상에서 재활치료 선생님들이 제일 힘들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몰라. 내가 수술은 600 들었는데 치료비는 1년에 800이 들었어요. 하나하나 전혀 안 움직이는 다리를 선생님들이 그냥 노력으로 움직이게 만들어줬어. 재활치료 선생님들이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
재활치료 기간을 떠올리면서 내 무릎을 선뜻 그러면서 살짝 건드리면서 설명했다. 난 그냥 듣기만 했다. 네네. 힘드셨겠어요. 더 나아지실 거예요 정도. 그러다가 불쑥 그런데 예쁘세요.라고 말했다. 아주 잠깐 쑥스러움이 스치는 듯했다. 이런 말을 많이 들은 사람 그리고 그런 말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사람의 덧없는 표정도.
"예쁜 거 이런 거 중요하지 않아. 나중에 나이가 들면 건강한 게 이쁜 거야. 이렇게 얇고 이런 것도 안 중요해. 이렇게 건강한 게 예쁜 거고 그게 인생에 중요한 거야. 건강 잃으면 직업도 잃고..."
내 눈엔 50대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데 60이 넘으셨다는 이 분의 직업은 영양사였다. 정부 종합 청사에서 오래 일했었고 높은 하이힐을 신고 이 층 저 층을 오르내리며 활동적으로 일 했었다고 한다. 그 활력을 빼앗긴 아픔과 답답함이 느껴졌다. 지금은 어린이 급식일을 한다고 하셨다. 그분 얘기를 듣다가 한 정거장을 더 가서 내렸다. 내가 정류장을 놓친 걸 눈치채고는 이렇게 더운데 어떡하냐고 걱정이 한가득이시다. 상황을 이렇게까지 빨리 파악하고 반응하는 것에 마지막까지 놀라며 일어섰다.
"다시 한 정거장 돌아가는 거 타면 돼요. 얼른 건강해지세요."
제주도 여행 때 잠깐 대화를 나눴던 해녀 할머니
초면인 사람이 자꾸만 말을 걸고 신체적인 접촉까지 하고 더 나아가 개인사까지 늘어놓는다면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날 짧은 대화가 불쾌감 없이 이어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깥 날씨와 대비되는 쾌적한 버스의 온도와 습도, 같은 여성이라는 안도감, 그 당시 나의 기분, 옷차림... 이런 우연들이 한몫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분에게서 우연한 부딪침이 대화가 되게 만드는 필연적 요소들을 많이 발견했다. 상대를 봐가면서 적당한 어조와 성량으로 조금씩 전진하며 건네는 대화 조정 능력, 맥락과 상황을 파악하고 적당한 반응을 보이는 정확성, 젊은 날 활동적으로 자기 커리어를 쌓은 사회인으로서의 경험, 타고난 것을 잃어본 경험을 원망과 분노로 매듭짓지 않은 사람의 지혜, 극복의 역사에 누가 도움을 주었는지 기억하는 겸허함...
의미부여가 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난 넓지 않은 인간관계를 이런 식으로 관찰하고 하나씩 배움을 쌓아가면서 사람에 대해서 배워왔다. 어쩌면 그런 나의 가난함이 이 장면과 이 대화를 기억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모르는 타인에게 말을 건넨다는 것은 실례를 무릅쓰는 것이다. 하지만 말을 건넨다는 실례 이후의 대화에서 실례하지 않을 정도로 자신을 수련했다면 실례가 용기가 될 수 있다. 초면에 예쁘다는 말을 주고받는다고 무조건 실례가 아닌 이유는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무더운 여름처럼 지겨운 일상에 이렇게 상큼한 실례가 나를 일깨워 주는 것은 나에겐 오히려 감사한 일이다. 혼자 사는 나에게 아무와도 대화하지 않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은 나에게 시도로서의 실례는 실례로 기억되지 않는다. 중요한 실례 다음에 일어나는 일일 것이다.
내리기 직전에 돌아보니 밀짚모자 아래로 보이지 않는 얼굴이 창밖을 항하고 있다. 해가 맑고 강하게 쪼이고 있다. 정말 더운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