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사의 연못, 암리차르
시크 교인들의 성지이며, 신앙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인도 암리차르, 그곳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심장을 쿵 하게 만들던 '슬픈 구루의 눈빛'이 떠올랐다. 시크 교인들의 행렬을 따라 사원 안으로 들어서서 마주쳤던 그 눈빛은 20년 지났지만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타블라'라는 인도의 타악기 연주를 들을 때면 더욱더.
암리차르는 '불사의 연못'이라는 의미로, 연못 중앙에는 아름답고 눈부신 황금색 사원이 자리 잡고 있다. 시크 교인들만의 종교적 취향이 그대로 드러난 황금사원을 떠받들고 있었다. 녹색 연못엔 싱싱한 생명력의 잉어떼가 푸드덕거리고 있었다. 사원 앞 상징적인 나무 주주베에는 수없이 몰려들었다가 날아가던 참새떼의 반복적인 패턴이 진풍경이었다. 그때를 반추하노라면 여러 감각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영국의 탄압과 이슬람교인의 박해로 인한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간직한 시크 교인들의 순례 행렬은 어쩌면 지금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으리라. 사방으로 뚫려있던 사원의 출입구는 모든 이에게 그 공간을 개방하고 있다는 것인데 시크 교인들의 열려있는 의식을 엿볼 수 있었다.
황금사원 방문객은 존경의 표시로 두건을 쓰고 신발을 벗어야 한다. 입구에서 빌린 두건을 쓰고 맨발로 성지를 둘러보았다. 뜨거운 햇빛에 익을 만큼 익은 대리석 바닥에 발을 대는 순간 처음엔 델 듯 뜨거웠지만 찜질하는 셈 치고 행렬을 뒤따랐다.
암리차르 사원 안으로 들어서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끊임없이 밀려들던 숭배 인파들로 계속 전진해야만 했다. 떠밀리던 순간, 무념무상의 슬픈 눈빛을 한 구루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 가슴 철렁했던 순간을 어떻게 설명할까?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 고요한 눈빛이 내 마음에 머물던 순간은 찰나였다. 하지만, 영원처럼 지속되는 느낌이었다.
마침내 가장 깊은 성소에 도달한 기분이었다. 이곳에 오기 위해 바깥세상을 그렇게 헤맸던 것일까. 모든 낯선 문들을 두드리며 방황하다 드디어 이곳에 도착한 것일까?
그때 귓전에 울렸던 음악. 지금까지 뇌리와 마음과 귓전에 남아있던 소리와 가락은, 인도 여행 중 줄곧 마음에 울림을 준 '타블라'라는 악기였다. 타블라와 여러 개의 악기가 조화롭게 협연한 소리였지만 내 귀에 맴도는 소리는 오로지 타블라였다. 내 심장이 쿵 하며 멈춘 순간에 타블라 역시 쿵쿵 울려댔으니까.
그때의 정서를 언어로는 표현불가다. 그저 까마득한 느낌으로 가슴 한쪽에 각인된 상태다. 잿빛과 보랏빛이 섞인 그리움이라는 단어로 그날, 그 찰나의 신비로운 정서에 색을 입혀 볼 수 있을까? 아무튼 내 눈은 보았고, 귀는 들었으며, 마음은 두근거렸다.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오로지 타블라 연주를 듣고 느끼는 것이다.
순례를 마치고 해 질 녘의 황금사원을 보기 위해 연못 주변에 걸터앉았다. 시크교인들과 함께 해지는 풍경을 배경으로 빛나는 황금사원을 바라보았다. 그저, 아무 말이 필요 없는 시간이 바로, 해 질 녘 즈음이었다.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일몰시간이면 언제나 마음이 젖어들다 잦아들었다.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변하는 시간이 다.
여행 중에 맞닥뜨리는 석양 앞에서 언제나 시의 순간을 진하게 체험했다. 시어가 머리에서 가슴으로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슬픈 구루의 눈빛도 아스라이 되살아났다. 침묵한 채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오감으로 받아들였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시큰하고 떫은 향이 느껴졌다. 바람결에 보송해진 피부와 흔들리는 주주베 나뭇잎소리에 모든 것들이 화해했다. 어둠이 느릿느릿 기울기 시작했다.
타블라의 선율과 슬픈 구루의 눈빛이 오래도록 선회했다.
얼마쯤 잤을까? 새벽 04:30분부터 시작되는 시크교 경전 읽기와 함께 울려 퍼지던 음악소리에 눈을 떴다. 음악소리를 타고 슬픈 구루의 눈빛이 희미하게 되살아났다. 순간 타고르의 문장이 떠올랐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밝아오는 새날을 잘 살아내는 것은 결국 나다.
"시인의 말에서 사람들은 마음에 드는 의미를 찾습니다. 하지만 그 최후의 의미가 가리키는 것은 바로 당신입니다." - 타고르의 기탄잘리 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