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지내요?"
죽음 속에 삶이 있다.
삶 속에 죽음이 있다.
안락사 그리고 소통, 결국 외로운 존재 인간.
삶은 계속되고, 죽음은 산 자의 마음속에 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나는 내 죽음을 선택할 권리도 있는가.
생명체로 태어났으니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생존해야 하는가.
최고의 죽음이 있다면 최고의 삶도 있을까.
나의 결단에 동행해 주는 이가 있다면 죽음이 쓸쓸하지만은 않겠지.
영화 관람 중 뇌리 속에서 끊임없는 질문들이 이어졌다. 옆 좌석 젊은 여성은 시작부터 내내 내 좌석 쪽으로 머리를 기울이며 꾸벅거린다. 아무래도 누군가의 옆방 친구가 되어주긴 힘들겠다 싶었다. 짜증스러웠음에도 영화 스토리가 나를 끝까지 부여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영화관을 나서는데 밤하늘이 유독 검다. 별 하나가 내 눈으로 떨어진다. 문득 묻고 싶어졌다. 모든 이들에게.
"어떻게 지내요?"
영화도 좋지만 어떤 영화관에서 관람하느냐도 내겐 중요하다. 경희궁 한 자락을 품고 있는 에무시네마는 밤길 산책이 낭만적이다. 룸 넥스트 도어처럼 삶과 죽음을 성찰하는 영화를 보고 난 후 산책은 필수요건이다. 내 안으로 잠적해 걸으면서 영화 속 장면과 대사들을 떠올려 본다.
영화 속 동행 2인은 젊은 날 함께 했던 시간을 추억하고, 문학을 논하고, 삶과 인간애를 나누는 시간으로 채워나간다. 암 투병 중인 마샤(틸다 스윈튼)는 다크 웹사이트를 통해 안락사할 약도 구입했고, 죽을 준비를 마쳤으니 잉그리드(줄리안 무어)에게 옆방에 있어달라고 부탁한다. 잉그리드는 고뇌하고 갈등하지만 결국 마샤의 부탁을 받아들이고 우드스톡에 위치한 별장으로 함께 여행을 떠난다. 행복한 추억이 있는 곳은 죽음의 장소로 어울리지 않는다며 아무 추억도 없는 그저 풍광이 좋은 장소를 선택한 마샤. 자신의 존엄한 죽음을 위해 많은 고민을 한 마샤의 탁월한 선택이었다.
마샤와 잉그리드, 두 사람의 의상 색감, 실내 인테리어 색상, 전체적인 무드와 빛으로 전하려는 감독의 의도가 여실히 파악되는 부분이었다. 감독을 모르고 보더라도 영화 스토리나 톤이 이전과 좀 다르게 느껴져도 색감만으로 이미 페드로 알모도바르임을 알아채기에 충분한. 죽음을 다룬 영화지만 따뜻했고, 한편으로 추웠으며 가슴에 뜨거운 광선과 찬 빛줄기가 동시에 부딪쳤다.
부딪치는 지점은 언제나 내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와 관련이 있겠지. 예순을 살면서 죽음이 언제나 곁에 있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삶이 있으니 죽음이 따르는 법, 그래서 죽음과 벗이 되어 살고 있다. 뜨겁기도 차갑기도 한 삶, 냉정하게 살다 열정적으로 삶에 종지부를 찍고 싶다. 마샤처럼. 옆방에서 냉정하게 죽겠다던 그녀는 빨간 문을 열고 나와서 노란 옷차림과 곱게 화장을 한 채 햇살 찬란한 테라스 장의자에 누워서 열정적인 표정으로 삶을 마감한다.
마샤는 삶이 자연이었고, 거실이 나무였고 꽃이었으며, 우드스톡 별장은 모든 것이 풍경이었다. 삶의 풍경화를 마샤는 죽음으로 장식한다. 냉정과 열정이 딱 반반씩 섞인 채로. 잘 살다 간 죽음이다. 잘 죽은 삶이다. 그렇게 나는 룸 넥스트 도어를 해석하고 싶다.
영화는 내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무거운 과제를 받은 느낌이랄까. 그럼에도 두 사람의 눈빛과 교감, 그 속에서 흐르는 대화 모두에 마음과 귀를 활짝 열고 기울이게 하는 힘이 있었다.
감독은 어쩌면 영화 촬영하는 과정 속에서 시나리오를 디테일하게 수정해 나가지 않았을까? 왠지 매 신마다 그저 지나치기 어려웠다. 신과 신 사이의 행간을 곱씹게 했다. 잉그리드의 눈에 비친 마샤는 곧 잉그리드의 현재이자 미래였고, 우리 모두의 이야기와 무관하지 않다. 지금 내 시선에 비친 인물은 누구인가. 현재 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어떤가.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곧 현재이고 실존이니 말이다.
마샤와 잉그리드 두 사람 의상의 변화, 후반부 잉그리드와 미셸의 의상 대비는 마샤와 잉그리드가 병실에서 만났던 첫 신을 떠올리게 했으니까.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색감으로 대사와 캐릭터의 존재감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내적 변화를 대변하니까.
정신이 온전할 때 존엄한 죽음을 선택한 마샤, 닫힌 문이 아닌 대자연 속에 안긴 채 죽기 직전 평화로웠으리라. 그렇다. 산 자와 죽은 자 위로 눈은 내린다. 결국 눈은 우리 모두에게 내린다. 삶과 죽음은 언제나 공존한다. 내리는 눈이 온 대지를 덮는 것처럼.
제임스 조이스의 『죽은 사람들』 중 표현은 영화에서 세 번 등장한다.
"눈이 내린다. 네가 지쳐 누워있던 숲으로, 네 딸과 내 위로, 산 자와 죽은 자 위로."
그렇다. 생명력을 부여해 주는 죽은 자와 생명의 빛을 잃어가며 꾸역꾸역 살아가는 산자의 간극은 얼마나 얇은가. 죽지 못해 산다고 하고. 살지 못해 죽는다고 하지 않나. 동전의 양면처럼 삶과 죽음은 언제나 인간 곁에 함께 머문다. 어떤 것도 외면할 수 없다. 선택은 오롯이 본인 몫이다. 산 자와 죽은 자 위로 공평하게 눈이 내리니까.
엔딩 직전 마샤의 딸, 미셀과 잉그리드가 만나서 테라스에서 대화를 나누던 중 눈이 내린다. 4월이었는데. 그렇지, 4월에도 눈이 내리지. 잔인한 4월은 무엇이든 가능하니까. 4월은 모든 이들의 머리 위에 있으니까. 모든 이들의 발아래 있으니까.
(사족) 첫 신 장소가 잉그리드 신작 팬사인회가 있는 뉴욕 리졸리 서점이었다. 순간 그곳에서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문을 밀고 들어섰을 때의 공기, 소파에 앉아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던 딸아이, 그 서점을 찾게 해 준 영화 <폴링 인 러브> 속 메릴 스트립과 로버트 드니로의 사랑이 시작된 곳(이후 리졸리는 장소를 이전했지만)이다.
잉그리드는 마샤의 죽음 이후, 그녀의 종군 수첩을 바탕으로 또 다른 신작 집필에 몰두하겠지. 완성된 작품 속에서 마샤는 어떤 빛깔로 생명력을 발할까. 잉그리드는 그때도 리졸리에서 팬사인회를 할까. 리졸리의 추억을 따라 잉그리드의 작품 앞에 서 있는 나를 그려본다. 잠시 영화 같은 상상을 해보며 빙그레 웃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