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들래 Nov 05. 2024

To. 헬렌 한프!

채링크로스 84번지를 서성거리다

  <채링크로스 84번지> 이 책은 1949년에서 1969년까지 20년간 헬렌 한프라는 도서 구매자와 프랭크 도엘이라는 서점 직원이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 놓은 책입니다. 글쎄요? 편지라기보다는 도서 주문서와 청구서라는 상업적인 문서였죠. 구하기 힘든 희귀한 것을 구하는 자의 절실함과 그걸 이해하는 자의 성실함으로 이어진 20년간의 기록입니다. 가난한 작가 헬렌과, 점잖고 진지한 서점 직원 프랭크 도엘의 편지를 통해 시공간을 초월한 우정을 만나볼 수 있는 책입니다.


  제가 이 책과 인연을 맺은 건 2009년이었습니다. 헬렌, 듣고 있나요? 처음 그대에게 건네는 저의 인사를. 당신이 세상을 떠나고도 12년이 지난 후에야 저는 그대를 알게 되었죠. 사실 서간문으로 채워진 이 책이 처음엔 좀 딱딱하게 느껴졌어요. 우정이나 사랑을 나누는 편지가 아니라 중고책을 주문하는 편지였으니 너무나 당연하죠? 처음엔 좀 의아했죠. 뉴욕에 사는 당신이 왜 런던으로 책을 주문했을까? 발품을 좀 팔면 뉴욕에서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에서요. 


  2017년 5월, 뉴욕 59번가를 걷다가 아거시 중고 서점엘 들렀어요. 문득 그대 생각을 했죠. 그대는 어퍼이스트 95번가에 살았는데 아거시 서점은 59번가에 있었거든요, 헬렌! 그대는 1925년에 개점한 아거시의 존재를 몰랐나요? 아거시에는 당신이 좋아할 저렴한 중고 책들도 보유하고, 초판본 및 희귀본들을 두루 갖춘 서점이었을 텐데 말이죠. 당신과 프랭크의 인연을 시작으로 인해 지척에 있던 아거시와의 인연은 아쉽게도 점점 더 멀어지고 말았군요. 혹여 그 시절 아거시 중고서점도 그대가 원하는 희귀본은 고액에 거래됐을지도 모르겠군요. 그 당시 발품 팔아 찾은 서점에서 겨우 한두 권 찾아내면 가격이 너무 비싸다는 이유로 쉽게 구할 수 없었던 걸 보면요. 아거시라면 그래도 다르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들긴 하지만요. 아무튼 우연히 잡지 광고를 보고 런던의 중고 서점 막스 앤 컴퍼니를 알게 되죠, 그때부터 서신으로 책을 의뢰했고요. 


  헬렌과 프랭크, 두 사람의 첫 편지는요? 희귀 고서적에 취미가 있는 가난한 작가가 절박하게 읽고 싶은 한 권당 5달러가 넘지 않는 중고책 목록을 런던 막스 서점으로 보냅니다. 헬렌의 주문 편지에 20일 후 서점을 대표하여 프랭크 도엘이 답신을 보내죠. 


  <저희는 부인의 문제 가운데 3분의 2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부인께서 원하시는 두 권 모두 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서적 우편으로 보내드립니다.>


  인연이란 게 뭔지 참. 처음으로 주문한 책을 받아 들고 프랭크에게 보낸 답신, 기억하고 있나요? 고급 피지와 상앗빛 책장을 함부로 만지지 못할 정도로 즐거웠다는 내용이요. 편지로 책을 주문하고 우정을 나누는 관계, 이 가을 더 낭만적으로 느껴집니다. 주문한 헌 책을 받아 들고 그대는 속표지에 남긴 글이나 책장 귀퉁이에 적은 글이 좋다고 했지요. 먼저 그 책을 읽었을 사람과의 동지애가 느껴진다고요. 개인적으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읽고 중고책 읽기를 꺼려했는데 헬렌 그대를 알고부터는 생각이 좀 달라졌어요. 얼마 전 부산 여행 중 보수동 헌책방 골목을 오래도록 산책하기도 했죠. 발길을 이끄는 책방에 들러 헌책을 들추어보았어요. 책 속에 메모된 글과 접힌 모서리 쪽 밑줄 그어놓은 부분을 보는데 코끝이 찡해지더라고요. 이게 동지애일까요?


  난생처음 만나는 아름다운 초판 책을 받고는 하루 종일 만지작거리며 행복했을 그대의 모습이 눈에 그려집니다. '은은하게 빛나는 가죽과 금박 도장과 아름다운 서체'의 책이라니요. 그래서일까요? 누추한 단칸방 침대 겸용 소파에서 읽을 책이 아니라고 했죠.

  프랭크라면 아마 그대에게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헬렌! 당신의 공간에서 읽기에도 충분한 책이에요. 그대로 행복하게 독서하세요."

  저의 마음도 같답니다. 영화 속에서 보여준 그대의 서재도 충분히 분위기 있고 탐나는 공간이었으니까요. 장소가 어떻건 책을 사랑하는 그대에겐 그대가 있는 바로 그곳이 최적의 장소일 테니까요.  


  이렇게 여러 해 동안 편지는 계속됩니다, 이즈음 프랭크는 서점을 찾는 중년 여성들을 보면 혹시 헬렌이 아닐까 하는 심정으로 유심히 바라보는 장면이 영화에 등장하는데요. 정작 막스 앤 컴퍼니에 그렇게 가고 싶어 했던 헬렌, 그대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가지 못합니다. 대신 절친인 연극배우 맥신이 런던 공연 중 막스 서점을 방문하는데요, 그때 보내온 편지 내용은 헬렌, 당신도 분명히 좋아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디킨스의 책에서 튀어나온 듯한 서점이라니요, 어둑한 실내가 눈에 보이기 전 곰팡이와 먼지 냄새가 먼저 손님을 반기는 서점이라니요, 오랜 세월에 걸쳐 먼지를 빨아들인 참나무 책장이라니요. 친구의 편지를 받은 헬렌의 마음은 이미 막스 서점에 도착해 있었을 겁니다.


  저도 그런 중고 서점 분위기를 좋아하기에 맥신의 편지 내용에 고개를 주억거렸어요. 헬렌, 당신이 직접 마크 서점에 갔더라면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끝내 그곳을 방문하지 못한 당신을 대신해서 <84번가의 연인>이란 영화 속, 헬렌은 서점이 문을 닫은 후, 텅 빈 서점을 홀로 찾아가는 장면으로 오프닝과 엔딩을 장식해요. 그대의 책만큼 제가 사랑하는 영화 속 장면이랍니다.


  막스 앤 컴퍼니 중고서점을 묘사해서 보낸 맥신의 편지를 읽으면서 언젠가 저도 그곳을 방문해 보고 싶었죠. 기억 속 막스 서점 흔적을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드디어 2017년 겨울 런던 여행 중, 채링크로스 84번지를 찾았는데요, 그 자리에 정말 맥 빠지게 맥도널드가 자리 잡고 있더군요. 아쉬움과 허탈감을 달래며 막스 서점과 비슷한 분위기의 다른 중고서점을 몇 곳 기웃거리다 왔던 추억이 떠오르네요. 

  영화 속에서 당신은 막스 서점까지 택시로 이동했지만, 저는 런던의 상징과도 같은 빨간 이층 버스 앞자리에 앉아서 차창 밖 풍경으로 채링크로스 거리를 만났습니다. 


  맥도널드로 바뀐 런던 막스 서점과는 달리, 뉴욕 맨해튼 59번가의 고층건물 사이에 당당하게 서있던 아거시는 3대째 이어지고 있는데요, 막스 서점은 사라졌지만 아거시는 그 명맥을 계속 이어나갔으면 좋겠어요. 아, 방문한 기억은 없지만 당신도 그러길 바란다고요? 역시 책을 사랑하는 당신답네요.


  헬렌, 당신의 책 속 내용 중에 제가 좋아하는 부분인데요. 봄날에 넋두리 없이 사랑할 줄 아는 시인의 시집을 요청하는 편지를 프랭크에게 보냈던 거 기억하나요? 센트럴파크로 산책 나갈 때 주머니에 꽂고 다닐 수 있는 아담한 책을 원했지요? 그에 대한 프랭크의 답신도 물론 기억하고 있겠죠? 어떤 식으로든 감사를 표하고 싶어 한 프랭크는 엘리자베스 시대의 연애 시집을 그대에게 선물하죠. 그 부분에서 저는 우정인 듯 사랑인 듯 아니 문학을 진정으로 공유하고자 한 사람들의 유대를 엿본 듯 설렜답니다. 그 장면을 영화는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어서 볼 때마다 미소 짓게 합니다. 


  헬렌, 뉴욕에 가면 하고 싶었던 것 중 한 가지가 바로 그대의 첫 번째 집과 두 번째 집을 찾아보는 거였어요. 첫 번째 집은 철거 후 그 자리에 다시 지어졌고, 두 번째 집은 그대로 보존, 아예 채링크로스 하우스로 명명, 그대와 런던 채링크로스 막스 서점을 기념하는 동판까지 새겨놓았더군요. 얼마나 반갑던지요. 정말 첫 번째 집에서 센트럴 파크까지는 5분 남짓이더군요. 프랭크가 선물한 시집을 들고 센트럴 파크로 산책 나가서 시를 읽던 장면이 영화 속에서 참으로 근사하게 그려집니다.


  재작년 가을 방문해서 당신의 발자취를 따라 그 코스로 산책을 나섰죠. 가벼운 시집을 준비해서요. 뉴욕의 가을, 그것도 센트럴 파크의 가을은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어요. 시공을 초월한 만남을 벤치에 앉아 살짝 체험했죠. 독서하기 더없이 좋은 공원에서 책과 어우러진 사람들, 책과 사람이 함께 있는 풍경은 언제나 아름답게 빛을 발합니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생각했죠. 뉴욕에서 런던으로 이어진, 주문 편지 행간에 숨어 있던 그 의미를 곱씹어 보기도 하면서요. 그것은 인연, 편지로 이어진 인연, 그 속엔 우정인 듯 사랑 같은 느낌들이 나지막하게 깔려 있더군요. 서신으로만 연락한 채 실제로 만나지 못한 그대들의 애틋함을 다소 풀어주듯 영화에서는 서로가  만나서 대화하는 느낌으로 연출했는데요. 원작만 한 영화가 흔치 않은데 유일하게 원작도 영화도 흡족했던 작품으로 기억합니다.


  헬렌, 당신은 희곡작가로 시작하여 방송 대본, 잡지 기사, 어린이 역사책 등 닥치는 대로 글을 썼지만 단 한 편의 희곡도 무대에 올리지 못했죠. 그래서 당신은 중년이 끝날 무렵 자신의 삶을 돌아보다가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나는 실패한 희곡작가였다. 나는 아무 데도 가지 못했고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아무 데도에는 막스 서점도 포함됐겠죠? 당신이 절망하던 그즈음, 채링크로스 84번지 막스에서 발송된 마지막 편지 한 통을 받게 됩니다. 도엘 씨가 별세했다는 소식이었죠. 40년을 막스에서 성실하게 근무했던 동료와의 이별을 모두가 슬퍼했습니다.


  헬렌, 당신은 프랭크 도엘뿐 아니라 막스 서점 직원들을 비롯, 프랭크의 아내 노라와 두 딸과도 서신 교환을 해왔기에 프랭크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얼마간 편지를 주고받았죠. 프랭크의 아내 노라는 때때로 당신을 질투했다고 고백했죠. 글 솜씨뿐 아니라 유머 감각 있는 그대의 편지를 남편이 정말 좋아했다면서요. 


  프랭크가 세상을 떠난 후 그대는 프랭크와 나눈 편지를 챙겨서 출판사로 향합니다. 이로 인해 헬렌, 당신은 삶의 전환점을 맞게 되죠. 세계 각국에서 편지와 전화가 빗발쳤고, 유명 작가로 거듭납니다. <채링크로스 84번지>는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 연극 등 다양한 매체로 만들어졌고 지금도 꾸준히 공연되고 있습니다. 그대가 그랬죠? 채링크로스 84번가를 지나게 되면 신세 진 서점에 대신 안부를 전해달라고요. 헬렌, 그대가 그토록 가보고 싶어 했던 채링크로스 84번지 막스 서점은 맥도널드로 바뀌었지만 흔적은 남아 있어서 당신의 안부와 인사를 제가 대신 전하고 왔습니다.

  헬렌, 궁금해서 묻는데요. 그쪽 세상에서도 그대 주변엔 책이 쌓여 있나요? 여전히 독서를 즐기고 있나요? 이제 제 편지에 그대가 답장을 쓸 차례입니다. 기다림에 익숙한 독자이니 서두르지 말고 생각날 때 답장 주세요. 


  추신: <채링크로스 84번지> 이 한 권의 책이 인연이 되어 탄생한 또 다른 커플의 영화 한 편을 소개합니다. 2016년 탕웨이가 열연한 <북 오브 러브>라는 영환데요, 혹자는 지루하다고 하는데 저는 무척 재미있게 관람했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영화입니다. 헬렌 한프 탄생 100주기를 기념해서 제작한 영화라니 감독 역시 헬렌 한프, 그대의 열렬한 팬이었나 봅니다. 불면의 밤, 이 영화를 추천합니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좌) 런던 채링크로스 84번지 마크 서점 위치, 2017 가을 & (중) 헬렌 한프의 첫 번째 집, 2017 봄 & (우) 뉴욕 아거시 북스토어


이전 18화 슬픈 구루의 눈빛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