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시계 추억

삶의 기록 1 - 정확함과 다정함으로...

by 물들래

아날로그시계 보는 법을 참 늦게 깨우쳤다. 아마도 1968년 초등학교 3학년 산수시간에 시계 보는 법을 배웠던 걸로 기억한다. 그 시절, 내게 아날로그시계는 도깨비보다 무서운 존재였다.


원형시계에 시침, 분침을 그려 넣고 그 밑에 ( )시 ( )분을 써넣는 시험이었다. 열 문제가 출제되었고 시험 결과는 10점이었다.


선생님이 걷어 간 시험지가 다시 책상 앞에 놓였을 때 100점짜리로 둔갑해 있었다. 아마 어떤 친구가 자기 이름을 써넣지 않았던 모양이다. 10점짜리 시험지가 내게 돌아오지 않은 걸 보면 나 역시 이름을 쓰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100점짜리 시험지를 얼른 감추었다. 방과 후 턱밑까지 숨이 찬 채로 집으로 달려왔다. 숨을 겨우 고르고 떨리는 마음으로 빈칸에 내 이름을 썼다. 아버지 일터로 가서 의기양양하게 100점짜리 시험지를 건넸다. 아버지가 한참 내 얼굴을 내려다보더니,


"지우개 꺼내라."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

느릿느릿 필통 속에서 지우개를 꺼냈다.


연필 자국을 흐릿하게 남긴 채, 괄호 속의 정답을 지우면서 나는 가슴이 쿵쾅쿵쾅 거렸다.

"다 지웠어요."


아버지는 손에 꼭 쥐고 있던 지우개를 빼앗아 흐릿한 연필 자국까지 빡빡 다 지우고,

"다시 풀어 봐라."


결과는 역시 10점. 시침과 분침이 12에 가있는 12시 정각만 정답이었다. 아버지의 반응,

"보기 싫다. 들어가라."


그때의 절망감이란... 어린 나이였지만 당분간 아버지 얼굴을 쳐다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땅속으로 꺼져 버리고 싶었다.


그때 시계를 잘 못 보는 둘째 딸에게 자상하게 설명하며 격려해 줄 수는 없었을까? 왜, 가짜 100점짜리 시험지를 당신에게 보이고 싶어 했는지 내 마음을 조금만 읽어 줄 수는 없었을까?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받아왔던 미술대회 상장을 하나도 기뻐하지 않고, 공부 잘해서 받는 상이 진짜라던 아버지께 이렇게라도 인정받고 싶었던 둘째 딸의 마음을 어쩌면 그리도 모를 수 있을까?


아버지를 속였다는 내 잘못을 뉘우치기보다는 냉정하게 나를 거부하던 눈빛만 상처처럼 마음속에 남아있다. 아버지는 아직도 그때 산수 시험 사건을 기억하고 있을까? 내게는 이렇게 선명하고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는데... 아날로그시계만 보면 그때의 추억이 아프게 떠오른다.


그 뒤로도 시계 보는 법을 금세 깨우치진 못했다. 몇 시 5분, 10분, 15분 간격으로 가는 걸 알 만할 때 몇 시 5분 전, 10분 전을 새롭게 배우는 건 또 왜 그리 어려웠던지... 정확히 언제 아날로그시계를 보게 됐는지 잘 모르겠다.


어느 날 아주 자연스럽게 아날로그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보이기 시작했다. 분침이 5에 있으면 25분인 걸 알았고, 분침이 11에 있으면 몇 시 5분 전이고, 몇 시 55분과 같다는 걸 분명하게 알게 됐으니까.


누군가 그랬다. 딸에게 속지 않을 만큼 딸을 정확히 알고 있던 아버지의 깊이를 생각해 보라고. 무관심한 부모는 웬일인가 싶으면서도 무심하게 박수를 쳐주기도 했겠지만, 아버지는 나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거다. 그 순간, 내 상처만 보았던 나를 멈추게 했다. 돌이켜보니 아버지의 확실한 시선이 지금의 나를 만든 건 아닐까?


웃으면서 그 시절을 회상하고 있지만 여전히 아버지 앞에서 두려움에 떨며 쪼그라들던 아홉 살 꼬마가 안쓰럽다. 그때 둘째 딸이 바라는 게 뭐였을지 한 번쯤 생각해 줄 순 없었을까. 존재를 인정받고 싶어서, 칭찬받고 싶어서 거짓말할 수밖에 없었던 둘째의 밑마음을 읽어줄 순 없었을까.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다 품은 아버지였다면 어땠을까. 정확함으로 일깨워주고 다정함으로 품어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디지털 시대의 정확함, 요즘 초등학생도 아날로그시계 보는 법을 배울까. 디지털 숫자로 알려주는 정확함보다 벽에 걸린 둥근 시계로 읽었던 아날로그의 다정함이 유독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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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네이버 이미지



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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