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책상 3 - 『파이 이야기』를 읽고...
십여 년 전, 영화 관람 후 원작을 찾아 읽었던 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흥미진진한 재독이었다.
읽는 동안 한 달 전 읽은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떠올리게 했던 부분이 있어서 더 빠져들었다. 삶의 의미를 사유하고 어떤 고통 속에서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는 점이 특히 그렇다.
100쪽 전후까지는 지루하지만, 130쪽을 지나면 가독성이 높아진다. 단순한 활자 여행이 아니라 독자 역시 태평양 한가운데 떠 있는 기분일 테니까. 구명보트에서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와 파도에 휩쓸리며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 들 테니까.
파텔은 호랑이보다 더 두려운 태평양과 더욱더 무서운 절망과 싸우면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1부 말미에서 해피엔딩을 언급했음에도 재미있게 읽혔던 것은 생생하고 구체적인 묘사가 넘쳐났기 때문이다.
천연색 캔버스에 물든 장엄한 태평양의 일몰에 감싸인 파텔, 그 사이로 넘쳐났을 소음, 하이에나의 높은 음역대 울부짖음과 오렌지주스의 낮은 음역대 울부짖음, 그 중간 어딘가에서 무기력한 얼룩말의 울음소리로 인해 더 이상의 소리는 들을 수 없었던 풍경을 떠올리는 것은 한마디로 끔찍했다.
인간이 훈련할 수 없는 공포 두 가지 중 하나가 예상치 못한 소음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경험했던 소음의 공포를 떠올려 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으니까.
'필요가 발명의 어머니'란 말이 얼마나 맞는지 실제 경험을 통해 터득한 파텔, 갈증에 대한 고통에 비하면 리처드 파커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던 파텔이 물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을 표현한 부분을 잊을 수 있을까. 그때 동시에 마신 삼다수 물맛이 얼마나 시원하던지. 그저 갈증이 났을 때 마시는 물이 이럴진대 몇 날 며칠 마시지 못했던 물을 마실 때의 기분은 어땠겠는가.
탐욕스러운 목구멍으로 순수하고, 선하고, 아름답고, 수정 같은 물이 흘러들어 온몸으로 퍼져 나갔던 순간을 이토록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는 건 물이 생명의 원천이기 때문이리라. 물은 촉촉한 생명력이고, 다시 살아나게 하는 찬란함이었다.
물을 마신 뒤, 숭고한 기분에 기쁨과 충만함에 사로잡혔던 파텔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날아갈 듯 상쾌한 기분이었다. 신비한 체험을 하듯 다시 물 한 모금을 마셨다.
흰 뿌리 같은 벼락과 어마어마한 천둥소리 앞에서 두려움에 떨던 리처드 파커와 정반대로 파텔은 경이로운 순간에 뚜렷한 한계에서 벗어나 숭고한 경외감을 느끼며 간청했다. ‘알라신과 온 세상의 왕과, 자비의 신과 온유한 심판의 통치자’에게.
파텔이 알고 있던 신들을 향해 간절하게 바란 그 순간만큼은 사소한 일은 사라지고 우주 속에 하나의 점처럼 존재하는 한 사람, 자신을 생각했으리라. 그 거짓말 같은 고난들을 이겨내고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파텔이 간절히 외쳐댄 신들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리처드 파커를 향해 터져 나온 말, '사랑한다', 그 말은 파텔의 표현처럼 진정으로 순수하고 자유롭고 무한했다. 파커가 없었다면 버텨내지도 견뎌내지도 못했을 거라며 포기하지 말자고 다짐했던 파텔이었다.
밀림이 시작되는 곳에서 걸음을 멈춘 파커는, 파텔의 기대와는 달리 돌아보는 일 없이 밀림만을 응시한 채 앞으로 나아갔다. 파커야말로 자신의 새로운 삶에 적응해 나가고자 다짐한 것은 아닐는지.
파텔이 독자에게 묻는다. 하이에나는 요리사, 얼룩말은 선원, 오랑우탄은 어머니, 리처드 파커는 파텔!
어느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냐고.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 아니면 동물이 나오지 않는 이야기, 선택은 독자들의 몫이다.
파이 이야기를 통해 확실하게 인식한 것은 예상대로 풀리지 않는 세상일은 우리가 어쩔 수 없다는 거였다. 그저 다가오는 삶을 받아들이고 할 수 있는 만큼 지금 여기에서 적응해 나가야 한다는 거였다.
'시련과 죽음 없이 인간의 삶은 완성될 수 없다'는 메시지는 『죽음의 수용소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시련 없는 인간의 삶은 삶이 아니다. 살아남고 싶다면 적응해야 한다. 지금 여기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저자 얀 마텔은 소설의 운명은 반은 작가의 몫이고 반은 독자의 몫이라 했다. 그러니 『파이 이야기』에서 얻은 교훈을 실천할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