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스물하나에 쓴 엽편소설
눈앞에 펼쳐진 푸른 바다는 흐린 하늘 때문일까. 블루 그라데이션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 내가 찾았던 빛깔은 바로 저런 걸 거야.
비로소 혜우는 십팔 개월간의 바다를 향했던 마음의 방황에 종지부를 찍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자 벌써부터 가슴속에 고이기 시작한 눈물이 찰랑거렸다.
제 모양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지만 그래도 정들었던 유람선. 바다만이 품고 있던 신비한 내음의 바람. 조그맣고 희고 고왔던 돌멩이. 물결과 어우러져 흐느끼던 조용필의 가락과 희미하게 떠오르던 이름도 없는 외톨이 섬. 바다가 울면서 전해주던 푸른 전설. 파랗게 다가왔다가 하얗게 부서지던 잔잔한 물거품. 그런 건 바다마을에서만 볼 수 있는 건데. 이제 바다풍경들과도 헤어져야 하는구나.
갑자기 발가락이, 손등이, 목 언저리가 차례로 서늘해져 옴을 의식했지만, 혜우의 보석같이 빛나던 마음까지 차갑게 시려 올 때, 혜우는 가슴속에 고여있던 눈물을 조금씩 흘리기 시작했다.
바닷새를 가슴속에 품고 나의 도시로 돌아가자. 아픈 상처를 할퀴듯 쓰린 울음을 우는 바닷새를 그리자. 바닷새의 날갯짓 같은 빛깔을 섬세하고 물결치듯이 그려보자.
*
"죄송합니다. 계산 좀 해주십시오."
멋쩍게 웃고 있는 웨이터는 형편없이 못생긴 얼굴로 카운터 쪽의 다갈색 벽시계를 가리켰다. 막 열하나의 숫자를 뛰어넘고 있었다. 혜우의 맞은편엔 썰렁하니 빈자리였고, 실내는 어둡고 침침했다.
스크루 드라이버 두 잔, 비프스테이크, 커피 한 잔.
웨이터는 계산서를 테이블에 내밀었다. 계산서의 숫자는 혜우 지갑의 지폐 넉 장을 훨씬 초과하는 금액이었다. 긴장된 얼굴로 웨이터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 역시 못생긴 가느다란 눈으로 혜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말했다.
'계산이나 하고 빨리 꺼져버려.'
그때였다. 구원자처럼 한쪽 구석 테이블에서 조그만 사내아이와 함께 카운터로 나오는 혜우 이외의 유일하게 남아있던 마지막 손님을 발견하게 된 것은. 농구선수처럼 체격이 당당한 중년의 남자였다.
"아저씨, 제 계산도 함께 부탁하면 너무 염치없죠. 나중에 갚을게요."
중년의 남잔 잠시 난처한 표정으로 망설이다가 혜우의 계산까지 했다.
바다는 그때부터 혜우의 고향이 되었다. 슈만의 음악을 뒤로하고 열 한시가 넘은 어둠을 열고 중년과 사내아이와 혜우는 말없이 걸어 나왔다. 조그만 얼굴에 온통 눈만 크게 보이는 사내애가 열 한시의 어둠을 뚫고 째랑째랑한 목소리로 남자에게 매달리면서 물었다.
"아빠, 아는 사람야?"
어둠 속에서 달빛만큼이나 환한 아이의 눈빛이 유일하게 반짝거렸다.
"모딜리아니 화집 때문이에요. 그걸 산 걸 깜빡했지 뭐예요. 드뷔시를 듣다가 제 주머니 사정을 의식했어요. 오늘 아저씬 정말 구원자였어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이럴 때 제게도 명함이란 게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중년의 남자는 그려내기 힘든 빛깔의 그늘을 얼굴 가득 지니고 있었다. 오랫동안 혼자만의 생활에 젖어버린 사람에게서 찾을 수 있는 비 오는 날의 음울한 기운 같은 것을.
비가 내린 뒤, 단아하게 정돈된 거리를 중년의 얼굴에서 발견한 것은 순간적이었다.
"집에까지 바래다주지. 내 차를 타도록 해요."
그렇게 만난 남자는 그날 이후로 혜우의 가슴속에서 소리 없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때로는 약하게 불꽃을 튀다가 어느 지점에선 폭발해 버릴 듯이 주체하기 어렵게. 차츰 중년의 남잔 혜우의 가슴에 파도를 만들고 있었다.
혜우는 바다가 되었다. 더러는 홀로 섬도 되었다. 파도가 밀려왔고, 바닷새의 노래를 들었고 날갯짓을 사랑했다. 수없이 그렸고 또다시 그렸지만, 바다의 오랜 전설을 다 그려내진 못했다. 그리는 작업의 의욕이 점점 상실되어 가는 자신을 느꼈다. 그 시기 혜우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그나마 세웠던 성마저 무너뜨리고 부수어 버리는 일이었다. 그건 결국 혜우의 의지로 세운 성이 아니었으니까. 그 무너뜨린 성 내부엔 허위와 진실 사이에서 방황했던 모습이 무서운 몸짓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
오렌지빛으로 장식된 실내로 들어섰을 땐 쇼팽의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아저씨와 함께 살고 싶다는 생각을 늦게나마 정리하기로 했어요. 당분간 그림만 그리겠어요. 바닷새의 날개를 그려볼 생각이어요."
건너오는 남자의 눈빛이 뜨거웠다. 저 남잔 어디서 온 사람일까. 혜우를 감당 못하도록 술렁거리게 한 서른여섯의 나이를 삼킨 저 남잔 대체 어느 거리에서 살다 온 무슨 빛깔로 빚어진 사람일까.
"그렇지만, 혜운 알아버렸어요. 도저히 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말을 항상 눈으로 말하던 아저씰. 알아요, 아저씨 마음을 혜우는 이미 다 알고 있어요."
즉흥환상곡이 울리는 실내에서 고통스러울 만큼 목 언저리에 통증이 느껴졌다. 그 몇 마딜 지껄이는 게 피를 토하는 것만큼의 아픔을 갖게 했다.
"자, 악수해야지."
이 우스운 작별의 표시. 바다마을로 혜우가 갔을 때. 혜우의 도시로 아저씨가 왔을 때. 그렇게 나누었던 작별의 표시. 이 따뜻한 손을 간직한 남자를 혜우만이 가슴속에서 불태우고 있다는 건 그녀만의 유일한 행복이자 자유였다.
열차에 몸을 싣고 혜운 조금씩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슬픔의 찌꺼기를 삼켰다.
"울 엄만 날 태어나게 하고 죽었대."
네 번째 준이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바다마을로 갔을 때 아저씰 쏙 빼닮은 얼굴의 준이가 그렇게 말했을 때, 혜우 눈앞에 펼쳐지던 바다는 그렇게 낯설어 보일 수가 없었다. 사랑받는 남편과 좋은 아빠와 성공한 실업가가 꿈이었다던 남자. 순식간에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겨 첫 번째 꿈을 상실해 버린 남자. 아내가 남겨두고 간 좋은 아빠의 꿈을 소중히 지키고 다듬어가는 따뜻한 마음의 남자.
이 남자를 혜우는 이제 종이배 접듯이 잊고자 한다. 혜우는 바닷새의 번뜩이는 날개를 따라 꿈을 꾸듯 그림 작업을 시작하려 한다. 혜우가 쌓고자 하는 의지의 성은 바닷새의 날갯짓 같은 빛깔이었다. 바닷새의 날갯짓은 곧 혜우의 자유였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