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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칼 여행 1

by 물들래

늦잠을 자고 일어난 K는 양치 후 주방에서 식사 준비를 했어. 그의 어깨에 내려앉은 난 그저 그가 움직이는 대로 흩날렸지, 뭐야.


식사 중에 그의 달걀부침 접시에 살포시 내려앉았어. K는 보는 즉시 나를 식탁 밑으로 내치더군. 낙하하는 순간 생각보다 충격이 세서 아팠어. 식사를 끝내고 싱크대로 돌아서는 K의 슬리퍼에 밟혔어. 슬리퍼에 붙어서 쉽게 떨어지지 않았지. K의 체중을 싣고 내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이 가?


설거지를 마친 K가 세탁실로 가려던 중에 슬리퍼에 붙었던 내가 어느 순간 복도로 날아갔어. 열어놓은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왔지. 소파 앞까지 날아온 난 이제 어떻게 될까.


세탁기를 돌린 후 K는 청소기를 들고 거실로 나왔어! 소파 앞으로 왔을 때 경악했지. 제일 싫어하는 공간이 청소기 속이거든. 다행히 청소기 강풍으로 가벼운 내 몸이 소파 위에 깔아놓은 알파카 위로 살짝 점프했네. 당분간 쉽게 눈에 띄지 않을 거야. 오늘은 일단 넘길 거 같은데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생이라잖아. 하물며 이런 미물의 한 치 앞을 누가 짐작이나 하겠어.


외출 준비를 마친 K가 소파에 앉네. 책 한 권을 챙기는 중에 전화벨이 울렸어. 알파카 모포에서 평온한 하루를 보내려는데 책 표지가 날 내리누르는 중이야. 통화만 끝나면 해방되겠지. 잠깐 참자. 통화를 마친 K는 책장을 펼치고 책갈피를 끼웠어. 그 순간 내 몸이 가볍게 날아올라 책장 사이에 내려앉았지, 뭐야. 덮기 직전 본 쪽수는 37쪽이었어. 30여 분 책을 읽더니 가방에 책을 넣고 일어섰어. K 가방 안, 책 사이에서 얼마나 숨 막힌 채 보내야 하는 걸까.


비내리다.jpeg
가벼운 여행.jpg
(좌) 5월 비 내리는 날 K가 촬영, 이때만해도 K와 함께 비 내리는 풍경을 바라봤지. (우)사진 출처: 네이버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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