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그부츠의 주인공은 L이다. L은 북촌 한옥에서 비교적 대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 스물 초입의 여대생이다. 2년 가까이 정들었던 K를 떠나온 건 슬프지만 그래도 아직은 지상에서의 삶은 지속되고 있으니 다행이지 않은가.
보통 떨어진 머리칼 동료들의 최후는 변기통, 혹은 진공청소기 속에서 쓰레기처리장으로 옮겨져 사라지는 게 대부분이다. 그나마 운 좋으면 잔디밭이나 자연 속에서 구르거나 날리며 지내는 것이지.
머리칼이 원하는 가장 좋은 삶이란 시신과 함께 재로 사라지는 거긴 해. 완전한 분해, 완전한 사라짐처럼 깨끗한 건 없잖아. 시신이 타면서 가장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건 아마 머리칼일 거야. 그러나 타는 순간뿐이지.
머리칼은 뼛가루와 함께 유골함에 담기는 순간을 가장 두려워해. 어딘가 갇힌다는 건 얼마나 지독한 고문인가. 죽어서까지 어딘가에 갇히고 싶지 않아. 그냥 훨훨 날아가고 싶어. 흔적도 없이.
아무튼 지금 나는 비교적 친숙한 K의 공간에서 L의 공간으로 이동한 것뿐이야. 재미있는 건 L이 현관에 들어서서 어그부츠를 벗는 순간 난 L의 감색 반 타이츠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는 거야. 다행히 안정감 있게 L의 타이츠에 붙어서 멋진 한옥 실내를 구경할 수 있었지. 단순한 아파트인 K의 집과는 분위기가 무척 달랐어.
안온해 보이는 상아색 느낌의 L의 집에서는 여러 색깔의 머리칼을 만날 수 있었어. 우선 L의 머리칼은 초록색이야. 하얀 얼굴에 초록 머리카락이 어울렸지. L을 반갑게 맞이하던 할머니의 머리칼은 정말 빛나는 은색이었어. 은색이 그렇게 어울리는 할머니가 있을까 싶은 정도였어.
L의 어머니는 좀 차가운 인상이었어. 반백이라 멀리 서는 잿빛으로 보였지. 높은음으로 반갑게 인사하는 몰티즈 반려견은 백옥같이 희었어. 하얀 눈밭이 연상됐어. 요놈한테 붙으면 큰일이란 생각이 들었어. 까만 머리칼이 백옥 같은 몰티즈 몸에 붙어있다고 생각해 봐. 발견되는 건 시간문제야. 그날로 변기통이나 쓰레기통 속으로 사라지이건 너무 당연하잖아.
몰티즈가 갑자기 짖어대기 시작했어. L의 남동생이 귀가했기 때문이야. 반려견에게 가장 애정을 쏟는 게 틀림없어 보였어. 카키색 비니를 쓰고 있어서일까. 머리칼 색이 궁금했어.
저녁때 식탁에 둘러앉았을 때 비니를 벗고 있는 남동생은 머리칼이 하나도 없었어. 빡빡 밀어버렸겠지. 두상이 예뻐서 민머리가 잘 어울렸어. 비니를 썼을 때도 벗었을 때도 밤톨같이 아름다운 두상을 가진 친구였어. 갑자기 궁금했지. 저렇게 빛나는 두상을 자랑하려면 미장원엔 얼마나 자주 가야 하는 걸까. 잘린 짧은 머리칼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아버지의 자리가 비어있지만, 네 가족이 저녁 식사를 시작했어. 아버지가 나흘 지나서 귀가한 걸 보면 긴 출장을 다녀온 거 같았어. 여러 날 지나서 아버지를 봤다는 건 L의 집에서 내가 무사히 생존해 있었기 때문이란 걸 다들 알겠지.
반려견 이름이 '콩이'라는 것도 알게 됐지. 검정콩처럼 까만 눈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싶어. 더 여러 날 지난 뒤 내 추측이 맞다는 걸 알았지. L의 집에서 내가 얼마나 길게 머물렀는지 예측할 수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