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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칼 여행 2

by 물들래

K가 책을 덮기 전 37쪽 문장을 기억해.

“어머니는 대가족을 원하지 않았다.”

대가족 사이에서 떨어져 나온 처지라 그 문장을 패러디해 봤어. ‘가족들은 나를 원하지 않았다.’ 어쩌다 무리에서 떨어졌을까. 아침마다 몇 올씩 떨어지는 편이라 언젠가 내 모습일 수도 있겠다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어. 가족과 작별 인사도 제대로 못 했거든.


어제 K가 샤워를 끝낸 후, 와인 한잔하면서 잠들기 직전까지만 해도 상쾌했는데 말이야. 가끔 K 꿈자리가 뒤숭숭할 땐 나도 쭈뼛쭈뼛 서곤 했지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어제는 무난한 밤이었어.


가족은 왜 날 버렸을까. 굵은 나와는 달리 주위 애들은 대부분 가늘었거든. 그 애들이 먼저 떠날 줄 알았는데 말이야. 풍성한 가족의 일원으로 행복했는데. 얼마든지 튼튼하게 자라면서 버틸 수 있었는데. 혼자 어둠 속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내내 흔들렸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3호선 전철 좌석을 차지한 K는 책을 펼쳤어. 펼치는 순간 눈앞에 모발이식 광고문구가 보였어. 내 모습을 광고로 보는 게 어색했어. 광고처럼 난 짧지 않거든. K 머리칼은 길어. 난 튼튼한 머리칼이야. 그렇게 튼튼한 모공에서 빠졌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말이야.


책장을 넘기는 순간 K의 책에서 벗어나 옆좌석에 앉은 여성 어그부츠 윗부분에 살포시 얹혀버렸네. 아슬아슬하게 얹힌 상태라 불안했어. 다행히 부츠 주인이 손으로 부츠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안전하게 부츠 속으로 들어갔어. 일단 안심했지만, 나의 주인 K를 떠나게 된 건 슬퍼. 아주 많이. 얼마나 긴 시간 그와 함께했는데. 그의 냄새, 성향, 정서에 익숙해졌는데 말이야. 고향을 떠나는 건 머리칼인 내게도 비애라는 걸 아는지.


어그부츠 속에 안착한 순간 슬픈 마음 한쪽으로 정체를 모를 흥분감과 호기심이 발동했어.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지금은 K와의 이별에 상심한 상태라 겨를이 없어.


K는 어쩌면 저렇게 태연할 수 있을까. 적어도 15개월을 함께한 세월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이야. 한 달에 정확히 1.1cm씩 자랐어. 16.5cm가 자라는 동안 얼마나 단단히 K를 잡고 있었는데. K에게 모든 걸 맞추면서 1년 하고도 8개월을 같이 지냈는데 말이야. 이제 헤어지면 K와 영영 만날 수 없을 텐데. 어쩌면 좋아.


16.5cm 이전의 시간은 어떻고? 반복적으로 자라서 잘리고 다시 자라고 잘리면서 그와 함께한 세월은 K의 나이와 같다는 걸. K는 자연스러운 반곱슬 단발머리지. 보통 2개월에 한 번씩 미장원에서 2cm씩 커트하고 염색했어. 그땐 일제히 짧은 머리칼들이 바닥에 떨어져서 왠지 모를 동지애를 느껴서일까. 슬픔이 그다지 크지 않지. 짧은 머리칼은 쓰레받기에 담겨 쓰레기통으로 옮겨지고, 이후 종량제 봉투에 담겨 영업장 앞에 놓여. 다음 날 새벽 청소차로 옮겨진 후, 그다음은 모두가 상상하는 대로야. 비참한 최후지. 오래도록 썩지 않은 채 악취에 시달리며 아름답지 않은 환경 속에 버틸 때까지 버티는 게 일상이야.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상상에 맡길게.


K는 알까. 내가 보통 머리칼과는 다른 특별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걸. K는 아마 모를 거야. 그건 바로 K와 텔레파시가 통한다는 거야. K가 어디에 있든 상관없이 K를 느낄 수 있다는 거야. K는 머리칼 한 올인 나를 어떻게 기억할지 모르지만, 난 K의 사고, 말, 행동 들을 멀리서도 모두 느낄 수 있어. 머리칼 한 올에 담긴 능력이 다른 머리칼과는 확연히 다르지. 슬프게도 일방적인 송신만 가능하다는 거야.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잖아. 내 고향 K에게 접속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건.


지금 K는 읽고 있는 책에 푹 빠져 있어. 내 존재는 까맣게 잊고. 나는 어그부츠를 타고 안국역에서 5분 전에 하차했고 K는 남부터미널까지 가서 내릴 거야. 며칠 전부터 예술의 전당 고흐 전에 가기 위해 일정을 여러 번 변경하다가 오늘 가기로 결정했거든.


머리칼 여행 1


가벼운 여행.jpg 글의 분위기와 어울리는 이미지 몇 컷 출처: 네이버 이미지


머리칼 여행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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