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머리 L의 아버지가 지방 촬영 출장을 마치고 돌아왔어. 갑자기 머리칼이 곤두섰지. K에게 텔레파시를 보냈지만, 반응이 없어. 아버진 바로 K가 열렬히 좋아하는 연기자가 나오는 드라마 연출자야. 비록 한 올의 외톨이 머리칼이었지만, K에게 연속 텔레파시를 보냈어. 하지만 아무 반응이 없네.
지금 난 민머리 비니에 붙어있어. 만약 K가 이곳에 있다면 청각을 곤두세우고 아버지 이야기를 경청했을 거야. 아침 식탁에서 가족이 나눈 대화가 흥미로웠지. 촬영장 에피소드였거든. 콩이로 비롯된 대화여서일까. 콩이도 까만 콩 눈빛을 반짝거리며 귀를 쫑긋거렸어. 드라마에서 콩이를 닮은 강아지가 잠시 등장하거든. K가 워낙 그 드라마 왕팬이라 나도 같이 관람해서 알고 있어. 그러고 보니 콩이랑 드라마 속 강아지랑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어. 사실 강아지들이 종만 같으면 대부분 비슷하게 생겼잖아.
안타깝게도 강아지 신 촬영 중 기구들을 연결하는 선에 걸려서 어깨뼈를 다쳤나 봐. 심하게 다치진 않았지만, 치료 중이라 다음 신 촬영이 불가능한 상태였어. 콩이를 보더니 아버지가 머리를 갸웃거렸어. 콩이도 아버지를 따라 고개를 갸웃거렸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엽던지. 가족 모두 웃음을 터뜨렸어. 가족 중엔 나도 포함이야. 오늘로 초록 머리 L의 집에서 열하루를 보냈으니까. 엄연한 가족 아니겠어?
곧바로 난 알아챘지. 콩이가 다음 강아지 신 대타가 될 거라는 걸. 이런 게 바로 나만의 특별한 능력이라는 거지.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 다음 날 아침 아버지는 콩이를 데리고 출근했어. 난 은발의 할머니 분홍색 스웨터에 안전하게 붙어있어. 은발 할머니의 분홍 스웨터라니 상상할 수 있겠지? 나이가 들수록 곱고 화려한 의상을 입으라는 교훈을 제대로 실천하는 분이야. 할머니는 7년 차 시니어 모델로 활동하고 있어. 그래서일까. 집에서도 옷차림에 신경을 써. 여느 할머니와는 다른 모습이라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가까이서 지켜본 할머니는 온화한 미소처럼 마음도 따뜻했고 단정한 모습이라 할머니와 가까이 있는 게 즐거웠어.
며칠 후 할머니는 소라색 원피스에 남색 모직 코트를 입고 에메랄드색 스카프를 둘렀어. 멋진 차림이었지. 할머니 매니저는 L의 엄마였어. 자주 웃는 얼굴은 아니지만 할머니에게 진심을 다하는 거 같았어. 사실 이 정도로 품위 있고 교양 있는 할머니가 시니어 모델까지 하면서 가정에 보탬이 되는데 누가 마다하겠어.
할머니는 수입의 대부분을 며느리에게 맡기는 것 같았어. 이런 시어머니라면 누구라도 좋아할 거야. 할머니는 꼭 필요한 말을 따뜻하게 전달해. K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어른이야. 할머니와 만나서 30분 정도만 대화 나눈다면 K는 은빛 머리 할머니와 친구하고 싶어 할 게 분명해. 뿐만 아니라 닮고 싶어 할 거야.
할머니 곁에 있다 보니 고향 같은 K가 계속 생각났어. K는 화려하지 않지만 소박하고 단정해. 분수를 알고 자기 관리가 철저하지. 몇 년 전부터 장래희망이 '책 읽어주는 할머니'라고 했어. K를 생각하면 늘 책과 같이 있는 모습이 떠올라. 미술전을 둘러보며 마음에 드는 작품 앞에서 오래도록 서서 자기만의 사유 속으로 빠져드는 걸 즐기는 K의 뒷모습도 생각나.
혼자 보는 영화를 즐겨서 K는 영화관도 자주 가는 편이야. 할리우드 쪽보다는 유럽 영화를 선호하는 K는 다양한 관계 안에서의 세밀한 소통과 정서를 다룬 영화를 자주 관람해.
그뿐인가. 낯선 곳을 여행하면서도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아. 차분함과 냉정함을 소유한 K는 여행지 특유의 공기와 정서를 마음껏 느끼며 자유롭게 떠도는 방랑객일 때도 있지. 오늘은 K와 함께한 추억들이 유독 그리워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