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생각에 골똘한 채 하루를 보냈어. 뭔가 한 가지 생각에 빠지게 되면 주변 환경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게 돼. 북촌로5길에서 K를 본 뒤부터 줄곧 그랬어. 하루해가 지고 귀가하는 길에서야 뭔가 이상한 기운을 느꼈던 거야.
은발 할머니의 에메랄드빛 스카프가 아니었어. 냄새부터 달랐어. 뭔가 진한 향수 냄새 속에 은밀히 숨어 있는 꿉꿉한 냄새를 감각했지. 여러 해 혼자 살아온 노년의 체취에 담배 냄새가 살짝 밴 냄새랄까. 익숙하지 않은 냄새였어. 그런데 은근히 나를 휘감는 냄새가 딱히 싫은 것도 아니더라고. 지금 난 시니어 모델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할아버지의 체크무늬 재킷 속에 있다는 걸 느꼈지. 어쩌다가 여기로 옮겨졌을까?
창덕궁 후원에서 시니어 커플 사진을 촬영하는 동안 여러 차례 옷을 갈아입었을 거야. 아마 그 틈에 할아버지 재킷에 안착했던 게 분명해. 부드럽고 따뜻한 캐시미어 감촉이 좋았어. 산양의 털로 짠 모직물이라 보온성이 좋았지. 잠깐이었지만 고향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포근했어. K는 주로 얇은 캐시미어 니트를 외투 속에 껴입곤 했지. 20cm 이상 자란 머리칼이 니트에 닿을 때의 감촉이 문득 그리웠어.
단란한 북촌 가족을 떠나 도착한 곳은 노량진이란 동네야. 할아버지가 직접 운전한 자동차는 언덕길을 올랐어. 할아버지는 나이에 비해 나이스한 운전 솜씨를 보였어. 주차 공간에 정확하게 주차한 할아버지를 따라 마당으로 들어섰어.
현관에 들어서기 전, 할아버지는 재킷과 모자를 벗어서 탁탁 소리가 나게 털었어. 외출 후 그런 행동이 할아버지의 루틴이란 것을 며칠이 지난 후 알게 됐지. 워낙 안전하게 붙어있던 난 소매 쪽으로 얼굴을 살짝 내민 채 바깥 풍경을 살폈어.
와, 한강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어. K가 좋아하는 풍경이잖아. 한강으로 산책했던 때가 떠올랐어. 가양대교에서 성산대교까지 강길을 K의 보폭에 따라 흔들리며 걸을 때 기분은 최고였지. 가끔 동작대교에서 한남대교까지 걷기도 했어. 도보로 한강을 산책하는 기분과, 이렇게 높은 위치에서 한강 야경을 내려다보는 기분은 사뭇 달랐어. 할아버지는 허리와 어깨를 곧게 펴고 심호흡을 여러 차례하고 천천히 현관문을 열었어.
거실은 짙은 갈색 톤으로 차분하게 가라앉아있었어. 거실 한쪽 벽에는 액자 둘이 걸려있었어. 가족사진과 부부 사진이야. 부부 사진 속 할머니를 바라보며 할아버지는 자연스럽게 말했어.
“다녀왔어요, 여보.”
할아버지 혼자 사는 모양이야. 좀 놀랐어. 혼자 살기엔 너무나 큰 집이었거든.
촬영을 마치고 시니어 모델 몇 명과 함께 저녁 식사를 마치고 온 터라 다행이다 싶었어. 왠지 혼자 식사하는 풍경이 너무 쓸쓸하게 그려졌거든.
주방으로 간 할아버지는 커피포트 전원을 켜고 거실 소파에 앉아 오디오를 틀었어. 음악이 흘렀어. 익숙한 곡이야. K도 자주 감상하던 음악인데 이게 무슨 곡이지? 생각날 듯 말 듯해. 한참 머리칼을 갸웃거렸지. K가 기억하기 위해 골몰할 때 그러듯 말이야.
푸른색 잔에 녹차를 우려서 소파로 온 할아버지는 허밍으로 곡을 따라 불렀어. 그때야 생각났지.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스프링’이란 것을. 할머니 사진을 보면서 할아버지가 말했어.
“당신이 좋아하는 계절이 곧 다가오겠지. 이맘때 당신이 자주 듣던 음악이잖아. 함께 들어요.”
이 집에는 할아버지 혼자가 아니었던 거야. 사진 속 할머니와 항상 이렇게 대화하는 것 같았으니까. 거기에 할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있는 나까지 있으니, 말이야.
지금 난 할아버지의 올리브색 스웨터 어깨에 옮겨진 상태로 이 넓은 집에서 얼마나 지낼 수 있을지 가늠해 보고 있는 중이야. 외롭고 쓸쓸한 할아버지 곁에 오래 머물고 싶었어.
할아버지 머리숱은 그렇게 많지 않았어. 흉하지 않을 정도의 머리칼을 소유한 할아버지는 멀리서 보면 회색에 가깝지만 가까이서 보면 검은색과 흰색 머리칼이 반반씩 섞여 있어.
다음 주 월요일에 7편,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