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는 숙면하는 편이야. 나의 주인 K의 남편은 칠순을 넘긴 뒤 밤잠을 못 자고 뒤척거리곤 해서 K 숙면을 방해하곤 했어. 그 바람에 나까지 깊게 못 잔 기억이 거든.
할아버지와 단잠을 자고 일어났어. 일어나자마자 침구 정리와 양치를 마친 뒤, 커피 메이커로 원두커피를 내리는 모습이 무척 자연스럽게 느껴졌어. 할아버지의 아침 루틴이란 걸 며칠간 함께 지내면서 알게 됐지.
커피를 내리는 동안 마당으로 나가서 한강을 바라보며 천천히 맨손체조와 스트레칭을 했어. 혼자지만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는 분이야. 한때는 마당에서 할머니와 함께 아침을 맞이했을 텐데 얼마나 홀로 생활을 해온 걸까. 이런 행동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은 걸 보면 여러 해 전부터이지 않을까.
백색 머그잔에 커피를 담아서 서재로 갔어. 커다란 모니터가 놓인 책상에서 컴퓨터 전원을 켠 뒤, 할아버지는 커피를 마시면서 컴퓨터 모니터로 뉴스를 살펴봤어. 아. 깜빡했는데 할아버지는 서재로 오기 전 커피잔을 들고 할머니 사진을 마주하더군. 꽤 오랫동안 바라보는 게 뭔가 대화를 나누는 분위기였어.
오늘은 무슨 음악을 들을까? 할머니한테 묻는 거 같았어. 어떻게 알았냐고? 왜냐하면 할머니랑 긴 시간을 보내고 나서 턴테이블에 레코드를 올렸으니까. 왠지 꼭 할머니가 좋아하는 음악을 튼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 모차르트의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뮤직이 적당한 볼륨으로 흘렀어. 썰렁하던 집안에 음악이 온기를 채워주는 것 같았지. 음악이란 게 뭔지 금세 상쾌한 아침으로 전환된 느낌이야. '소야곡'이지만 어느 시간대에 들어도 좋지. 할머니 취향이 K랑 비슷한 모양이야.
K도 좋아하는 곡이라 자주 들어서일까? 잠깐이지만 K가 생각났어. 지금쯤 K는 FM 93.1 주파수에 맞춰놓고 주방에서 아침 준비를 하고 있을 거야.
K처럼 나도 현실적인 머리칼이라 지금은 할아버지에게 집중하기로 했어.
할아버지는 A와 B 신문 사회면 뉴스를 유심히 살피는 것 같았어. 표정이 별로 밝지 않은 걸로 미루어봐서는 조간신문에 좋은 소식보다 나쁜 소식이 많은 게 분명해. 사실 이건 뭐 하루 이틀 일도 아니잖아. 머리기사를 진실로 믿는 사람들이 몇이나 되겠어. 진실을 누가 제대로 알겠어. 가짜뉴스가 남발하는 요즈음 진실이란 게 있기는 한 건지. 진짜가 가짜가 되고 가짜가 진짜가 돼버리는 인간사가 허망하기 짝이 없잖아.
인터넷 신문 보기를 마친 할아버지는 메일함에서 딸에게 온 메일을 발견하고 빙그레 웃었어. 그렇게 긴 내용의 메일은 아니었지만, 시간을 들여 정독하듯 읽었어. 가족사진에 있는 두 딸 중 어떤 딸에게 온 메일일까? 갑자기 궁금했어. 내가 알고 싶어하는 걸 풀어주기라도 하듯 할아버지는 둘째 딸에게 답장을 써볼까? 하면서 답장 쓰기를 클릭했어. 첫째 딸이 아니란 걸 알았지.
쓸쓸한 할아버지에게 메일을 보낸 둘째 딸이 고마웠어. 왜냐고? 할아버지를 미소를 짓게 했으니까, 말이야. 울릉도 사진을 여러 장을 동봉한 걸 보면 둘째 딸은 그곳에 살고 있는 것 같았어. 할아버지는 울릉도에서 행복해 보이는 딸사진에 대해 답메일에 언급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