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는 신길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탔어. 대방역만 지나면 노량진역이야. 5분 후면 내 주변을 통과할 거야.
머리칼에도 감정이 있다면 믿을까. 가까운 거리에 있는 K를 느낄 때면 더 그리워져. 할아버지와의 생활에 꽤 적응된 상태지만 그래도 K에게 갈 수만 있다면 가고 싶어. 귀소본능이랄까. 인간에게만 있는 본능이 아니라니까. 머리칼인 나도 그걸 자주 느끼니까 말이야.
용산역과 삼각지역, 그리고 서울역까지 K와 자주 이동했었는데. 1호선에서 나는 냄새가 있잖아. 1호선에서 더 다양한 냄새가 나지. 사람마다, 머리칼마다 다르겠지만 난 인천행 1호선 냄새보다 수원행 1호선 냄새를 선호해. 그렇다고 인천행 냄새가 싫다는 게 아냐. 그냥 수원행 열차에서의 추억이 더 달콤해서일 거야. 그 추억에 대해선 다시 얘기할 때가 있을 거야.
문득 튼튼했던 머리칼 2는 여전히 K에게 잘 붙어있는지 궁금했어. 머리칼 3은 어쩌면 K와 벌써 이별했을지도 몰라. 비교적 가는 머리칼 3은 늘 불안해했거든. 빠지지 않고 오래 버티는 게 꿈이었던 머리칼 3도 별수 있겠어. 굵은 머리칼 1인 나도 이렇게 떠돌이 신세가 된 지 오랜데 말이야.
왜 내가 1이냐고? 머리칼은 모두 자신을 1로 생각하니까. 나를 기준으로 좌측 머리칼부터 숫자를 부여하지.
머리칼끼리도 싸우곤 해. 난 머리칼 6과 유독 사이가 안 좋았어. 특히 머리 감을 때 자주 다투었던 것 같아. K가 손가락 끝으로 두피 마사지할 때나 샴푸 할 때면 조금이라도 K의 손길을 더 받으려고 싸우면서 밀치곤 했지.
샴푸 때문에 눈 쪽이 따끔거렸지만 K 손길 받으려면 참을 수밖에. 머리칼 1인 나도 K의 분신이니 머리 어깨 무릎 팔 부위가 다 있어. 머리칼 주제에 무슨 눈이 따가워하는 표정 짓지 말라는 뜻이야.
나와 머리칼 6은 유난히 잘 부딪쳤어. 부딪치는 건 그래도 낫지. 조금만 비틀면 벗어날 수 있으니까. 최악은 서로 엉킬 때야. 꼬여서 며칠 풀리지 않을 때도 있어. 심하게 엉킨 머리칼들은 그냥 통째로 빠지기도 했지. 그때 머리칼들이 동시에 질러대는 끔찍한 함성을 어떻게 표현할까.
그러고 보면 지금이 오히려 자유로운 건지도 몰라. 고향을 떠나왔지만, 무수히 많은 머리칼과의 전쟁에서 해방됐으니까. 머리칼 1로서 처신(어디까지나 나도 K의 분신이니까)만 잘하면 오래도록 버틸 수 있잖아. 할아버지와 길게 함께하고 싶어. 할아버지의 인생이 궁금하거든. 두 딸도 기회가 되면 만나보고 싶고 말이야. 혹시 알아? 할아버지가 큰딸을 만나러 비엔나에 가게 되면 두 번째 비엔나 여행을 할 수 있을 테니까.
재작년 11월, K만 비엔나가 좋았던 게 아니야. 머리칼 1인 나도 비엔나에서 맞은 바람과 비와 공기와 음악과 미술의 향연 속에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니까.
거기다 울릉도는 아직 가본 적이 없는데 작은딸이 노량진으로 올 때 기회를 봐서 작은딸 트렁크에 어떻게든 안착해 볼 생각을 벌써부터 하고 있거든.
할아버지 생일 축하 메일에서 서울 나들이 계획을 하고 있다는 내용을 얼핏 본 거 같았거든. 할아버지 표정이 금세 밝아지는 걸 미루어봐서 분명 조만간 작은딸이 노량진 방문하는 건 시간문제인 거 같아 보였어.
오늘 할아버지는 말러 교향곡을 듣고 있어. K는 아주 가끔 말러를 들어. K는 브람스와 바흐를 좋아하는 편이야. 베토벤과 슈베르트도 자주 듣는 편인 걸 보면 누굴 가장 좋아한다고 말하기가 좀 그렇지.
할아버지는 오늘 자신을 위해 선곡하고 싶다고 말했어. 할아버지 생일이잖아. 할머니도 이해할 거야. 할아버지는 말러와 슈만 위주로 네 장의 음반을 준비해 놓고, 녹차를 우려서 천천히 마시면서 음악 감상을 시작했어.
난 오늘도 할아버지의 상앗빛 캐시미어 조끼 좌측 어깨 쪽에 안착했어. 아주 적당한 위치야. 따뜻한 오후의 햇살을 할아버지와 함께 마주 보고 쪼일 수 있거든.
화창한 날씨가 혼자 생일을 맞은 할아버지의 슬픔을 쨍쨍하게 말려주었으면 좋겠어. 이건 순전 나만의 생각이야. 사실 할아버진 그렇게 슬퍼 보이지 않았으니까. 음악은 할아버지의 행복 비타민인 듯싶었어.
그나저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어떻게 만났을까. 연애했을까. 소개로 만나서 교제했을까. 어떤 부부였을까. 할머니는 어떤 분이었을까. 궁금했어.
갑자기, K 남편의 중후한 바리톤 음색이 떠오르네. K가 궁금해할 때마다 말하곤 했지.
“궁금해요? 궁금하면 500원.”
목소리도 추억으로 남는구나. K 남편이 잘 있는지 궁금한 걸 보면. 말이 없고 진중하지만, 가끔 빛나는 유머로 주변인을 즐겁게 하는 K 남편은 잘 지내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