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포도 해프닝
마음은 안 그런 데 행동이 영 따라주지 않는 사람이 있다. 특히 어린 딸과 어떻게든 재미있게 놀아주고 싶은데 어떡해야 즐거워할지 몰라 대단히 난감해하는 아빠가 있다. 열두 살 때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父에 대한 롤모델이 부재해서 더 그렇다.
술을 먹고 늦게 귀가한 철없는 아빠는 그날도 고이 잠든 딸아이 가까이 가서 볼을 어루만진다. 22개월 된 딸아이의 복숭앗빛 뺨이 얼마나 사랑스럽겠는가. 잠버릇 고약한 딸아이 힘겹게 재워놨는데 저러다 깨기 십상이다 싶었다. 어르고 달래서 겨우 철없는 아빠를 재우고 엄마도 까무룩 잠이 든다.
주말이다. 철없는 아빠는 아이와 퍼즐을 맞추며 놀아주고, 목말을 태워준다. 그림책을 함께 본다. 얼마나 여러 번 읽어주었을까. 한글을 모르는 아이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읽는다. 철없는 아빠는 놀란다. 천재라고. 비상한 녀석이라고. 그런데 며칠 후 책을 거꾸로 들고서 똑같이 읽는 걸 보고 반복 학습의 결과란 걸 깨닫는다. 세뇌 교육이 이런 거구나 하면서 실망한다. 그래도 암기력 하나는 끝내준다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저녁 식사 때 과일샐러드 준비하다 엄마가 식탁에 떨어트린 건포도 한 알을 발견한 철없는 아빠, 건포도 한 알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앞에 앉아 있는 딸아이 콧구멍에 넣어본다. 어 들어가네. 하는 순간 딸아이가 콧물을 삼키듯 "흐흡" 소리를 낸다. 소리와 함께 흔적 없이 콧속으로 사라진 건포도. 철없는 아빠 얼굴이 순식간에 사색이 된다.
정작 건포도를 흡입한 아이는 아무 표정이 없다. 그 광경을 곁에서 지켜본 엄마는 경악한다. 어떡하느냐를 연발하던 철없는 아빠가 순간 정신을 가다듬는다. 마음을 다잡고 아이를 안는다. 아이는 동그란 눈을 끔뻑끔뻑하며 당황한 아빠를 쳐다본다. 철없는 아빠는 반짝이는 아이의 눈빛까지 의심스러운 모양이다.
철없는 아빠가 외출복을 대충 챙겨 입고 허둥지둥 뛰어나가 택시를 잡는다. 병원 응급실에 도착한 아이가 금방이라도 어떻게 잘못될까 봐 정신줄 놓기 일보직전이다. 응급실 의사에게 경위를 설명한다. 곁에 있던 엄마가 보충 설명을 한다. 건포도 한 알, 몸 안에 감춘 딸아이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생소한 응급실 풍경을 이리저리 둘러본다.
딸아이의 진찰을 마친 의사는 별 이상이 없는 것 같단다. 주말 밤 열두 시를 넘긴 응급실엔 이비인후과 의사가 없는 관계로 아이에게 해 줄 별다른 처방이 없단다. 아침 일찍 이비인후과에 가보라는 이야기가 전부다. 아이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생글생글 웃는다. 철없는 아빠는 그 웃는 얼굴까지 불안하다. 아이를 품에 꼭 안고 돌아와서 아이가 잠들 때까지 노심초사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별일 없어야 하는 데를 반복하면서 아이 곁에서 꼬박 밤을 새운다.
철없는 아빠 출근하며 아내에게 당부한다. 병원 가서 무슨 일 있으면 곧바로 연락하라고. 엄마는 오픈 시간에 맞춰 아이와 함께 이비인후과로 향한다. 아이가 첫 환자다. 얌전히 진료 의자에 앉아 있는 딸아이를 앞에 두고 상황을 설명한다. 의사는 어이없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담담하게 웃으며 헤드램프를 켜고 아이에게 다가간다.
잠시 후 의료기구로 뽑아낸 크게 불은 옅은 갈색 건포도를 핀셋으로 집어서 보여준다. 어젯밤 그 작고 검은 건포도 알이 하룻밤 새 아이 콧속에서 완전히 다른 모양으로 변해 있었다. 의사가 말하기를, 자기 생전에 이렇게 큰 건포도는 처음이란다. 잠시 진료실은 웃음바다가 된다. 딸아이도 웃는다. 엄마는 웃음이 안 나온다. 철없는 아빠 생각하면 웃을 수 없다. 또 다른 사건 벌이지 않을까 벌써부터 걱정이다.
퇴근하자마자 달려온 아빠는 아이를 보고 활짝 웃는다. 아이를 안고 눈 마주치며 말한다. 아빠가 이제 그런 위험한 장난 하지 않겠다고. 딸아이가 철없는 아빠를 보고 활짝 웃는다. 목말을 타고 좋다고 한다. 동그란 눈동자를 굴리며 아빠와 엄마를 번갈아 보는 아이의 투명할 정도로 밝고 맑은 얼굴이 활짝 웃는다. 웃음소리가 반짝이며 부서진다. 철없는 아빠는 안심한다. 평화로운 빛이 세 가족 머리 위에 흩뿌려지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