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 할아버지와의 평화로운 시간이 덧없이 흘렀어. 오 개월을 훌쩍 넘겼으니까.
할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어. 내가 원하는 사람과 원할 때까지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할아버지와 오래 살고 싶다고 느낄수록 할아버지 주변에 밀착하게 된다는 것을. 어떤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 자유의지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어.
맞아. 머리칼에도 마음이 있다는 거야. 그러니 자유의지를 발휘할 수 있는 거지. 말이 안 된다고? 그래, 사실 나도 처음엔 그런 능력을 실감할 수 없었거든. 주인에게서 이탈하면 그냥 쓰레기통이나 변기통으로 영원히 사라진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알고 보니 나의 내적 동기나 이상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거야. 맞아. 조물주가 인간을 창조할 때 인간에게 부여한 그 의지를 머리칼인 나 역시 가지고 있다는 거야.
난 지금 노량진 할아버지와 가능하면 오래 함께 지내고 싶어. 놀라운 건 내가 원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거야.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K가 자주 언급했던 게 생각났어. 이런 능력을 진작에 알았다면 K를 벗어나지 않았을 텐데. 새로운 희망이 생긴 셈이지. 때가 되면 K에게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볼 거야.
아직은 세상 구경을 좀 더 해볼 거야. 우선 할아버지와 함께하면서 두 딸을 만나보고 싶어. 그리고 언젠가 인제 그만 정착하고 싶다고 느낄 때 나의 고향 K를 찾아갈 거야.
지금 나는 할아버지의 좌측 어깨 위에 있어. 동서남북 두루 조망할 수 있어서 답답하지 않거든. 햇볕도 쪼일 수 있고. 노량진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한강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게 무엇보다 좋아. 외출하지 않는 날 할아버지의 오전 루틴을 난 좋아하지. 테라스 흔들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며 책을 읽는 거야. K가 유독 그리워지는 시간이지만 말이야.
K가 좋아하는 작가의 어떤 책에서 봤는데 어깨뼈가 인체에서 가장 정신적인 곳이라고 해. 어깨로 쓸쓸한 사람을 알아볼 수 있다지, 아마도.
긴장하면 어깨가 굳고 두려울 때는 움츠리게 되고, 자신 있을 때면 어깨가 활짝 넓어지잖아. 난 예민한 머리칼이라 K의 어깨에 닿을 때 K의 기분을 금세 알아챌 수 있었지.
어깨로 내 주인의 기분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게 왠지 고맙더라고. K의 기분을 알아채고 최대한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 K를 위로하거나, 자신감을 더 북돋아 주곤 했으니까. K가 알았는지는 잘 모르겠어. 너무 미세한 감각으로 어깨에 닿았기 때문에 몰랐을 확률이 커.
할아버지 어깨에 살포시 앉아 있을 때도 할아버지의 기분을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어. 오늘 좀 힘들구나. 지금은 마음이 평화롭구나. 아직 긴장하고 있구나. 말했잖아. 난 그냥 보통 머리칼이 아니라고. 특별한 능력을 지닌 머리칼인 것을 이제 확실히 알았겠지?
지금 할아버지는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힘들어하고 있어. 어젯밤 서재에서 할머니 일기를 읽다가 잠깐 멈추더니 눈시울을 붉히셨어.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몇 년 전 다녀왔던 교토 여행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는 부분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