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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칼 여행 10

by 물들래

“진 여사. 나요.”


진 여사가 누굴까, 돌아가신 할머니는 유 씨인데. 할아버지 목소리가 무척 가라앉았어. 저쪽에서 뭐라고 반응했는지 모르지만 한참 침묵하는 할아버지 모습이 쓸쓸해 보였어.


“이제는 만나서 얘기 좀 나눠도 되지 않을까요?”


‘이제는‘이라고 말한 걸 보면 왠지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모양이다.


북촌 할머닌 김 씨니까 내가 모르는 새로운 인물이야. 누구지? 할아버지와는 어떤 관계지? 궁금증이 밀려왔어.


“네, 알겠어요. 그럼, 연락 기다릴게요.”


연락 기다린다는 걸 보면 당장은 만나지 않겠다고 진 여사가 말한 모양이야. 무슨 사연일까. 수화기를 내려놓고 할아버지는 피아노 소품곡이 담긴 엘피판을 꺼내서 턴테이블에 올렸어. 가끔 FM 음악프로그램에서 들었던 기억이 나.


리처드 크레이더만의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가 흘렀어. 커피를 들고 테라스로 나간 할아버지는 멀리 한강을 바라보며 머그잔을 그러쥐었지.


이쯤에서 당연히 유추했어. 지금 할아버지가 듣는 피아노곡이 방금 통화를 마친 진 여사라는 분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았어. 갑자기 나도 주인 K처럼 가상의 시나리오를 쓰게 되더라고. DNA가 어디 가겠어. 떨어져 나온 한 올의 머리칼이라도 나는 K의 것이었는데.


서재로 간 할아버지는 할머니 책장에서 노트 한 권을 꺼냈어. 표지를 두 손으로 어루만지다가 책상 위에 가지런히 올려두고 한참을 서 있었지.


잠시 뒤, 걸상에 앉더니 천천히 표지를 넘겼어. 한 장을 읽어 내려가는 데 시간이 꽤 걸렸어. 글씨 속에 숨어 있을 어떤 비밀을 찾아내려는 사람처럼 말이야. 할아버지가 그렇게 오래 들여다본 첫 장 내용이야.



1999년 4월 12일 월요일 오후 2시


그에게서 얼마 전부터 수상한 냄새가 났다. 딱히 규정짓기 힘든 냄새다. 학교에서 돌아온 그의 눈빛은 누가 보면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지만 미세하게 흔들리는 눈빛이 이전보다 조금 더 다정하게 느껴졌다. 이전과 다른 이질적인 그 다정함에 심한 거부감이 일었다. 그 다정함은 뭐랄까. 뭔가를 잘못하고 그것을 뉘우치려고 애쓰는, 그러면서도 잘못을 멈추지 못하고 반복하는 자신을 탓하는 듯한.

부디 내가 느끼는 것들이 망상이길 바란다. 앞으로 그에게 좀 더 섬세하게 신경을 쓰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내조를 이전처럼 해나갈 것이다. 마음의 흔들림을 드러내지 않고 침착하고 덤덤하게 그를 대할 것이다. 수상한 냄새를 맡았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할 것이다.


머리칼 여행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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