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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칼 여행 12

by 물들래


할아버지 취향의 도시는 도쿄였지만, 할머니는 교토를 더 좋아했어. 교토에 첫걸음 했을 때 고향 같은 느낌이었대. 차분하게 가라앉은 고즈넉함이 할머니 정서와 어우러져서일까? 그곳에 발을 딛는 순간 정착해서 살고 싶다고 했어. 그럴 수는 없었기에 매년 봄가을로 교토로 여행을 떠나곤 했어.


그때마다 할아버진 할머니가 원하는 교토로 기꺼이 함께 여행하곤 했어. 더러는 할머니가 원해서 할머니 혼자 교토로 여행을 떠난 적도 있었어. 일기를 세밀히 읽어보면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함께 떠났던 교토 여행보다 혼자만의 교토 여행을 은밀히 더 즐긴 것 같았어.


할머닌 혼자 시간을 잘 보낼 줄 알았거든. 교토의 가모 가와(江) 산책길을 사랑했고, 강가를 바라볼 수 있는 고요한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멍때리는 시간을 좋아했어. 그런데 말이야. 멍때리는 그 순간 할머니의 머릿속을 누가 알겠어. 할머니의 ‘멍’은 누구도 알 수 없는 거잖아. 멀리서 보면 그저 무념무상처럼 보이지만, 미세하게 촘촘한 기계 같은 걸로 할머니의 생각을 파헤쳐볼 수 있다면 어떤 사유들이 펼쳐지고 있었을까.


교토가 그리워질 때, 그곳으로 향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가끔 정지용 시인의 시집을 꺼내 보곤 했던 거 같아. 특히 ‘압천’이라는 시를 조용한 음색으로 읊조리곤 했다는 걸 일기장을 통해 알게 됐지.



가모가와 십리ㅅ벌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날이 날마다 님 보내기 목이 자졌다... 여울 물소리….

찬 모래알 쥐여 짜는 찬 사람의 마음, 쥐여 짜라. 바시여라. 시원치도 않어라.

역구풀 우거진 보금자리 뜸북이 홀어멈 울음 울고,

제비 한 쌍 떠ㅅ다, 비맞이 춤을 추어.

수박 냄새 품어오는 저녁 물바람. 오랑쥬 껍질 씹는 젊은 나그네의 시름.

가모가와 십리ㅅ벌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가끔 소리 내어 압천이라는 시를 읽던 할아버지는 할머니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으로 힘들어하곤 했어.

어젯밤에도 서재에서 할머니 일기를 읽다가 잠깐 멈추더니 눈시울을 붉히셨거든.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몇 년 전 다녀왔던 교토 여행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는 부분이었어.



2001년 4월 19일 목요일 오후 5시 50분


석양이 내려앉기 직전이면 떨어지는 빛 속으로 내 가슴도 타들어갔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었던 단 한 사람에게 완벽한 배신을 당했다. 긴 세월 동안 한 번도 내색하지 않고 감쪽같이 속아주는 척 연기한 나는 대체 어떤 인물일까. 무엇보다 혼란스러운 건 할퀴어진 마음 부위의 상처가 농이든 채 심한 통증으로 견딜 수 없었지만, 밖으로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다는 거다. 그간 알고 있던 나란 사람이 맞나 싶을만큼 안팎이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냈던 시간들이 허무했다.

엄청난 배반이었다. 그의 이중생활을 표 내지 않고 인내한 세월이 나 자신의 삶까지 가짜로 만드는 것 같아 혼란스러웠다. 집에서는 인자하고 어진 아빠와 남편으로 위장한 그에게 변함없이 보내는 내 웃음도 역겹다. 그만이 아니라 나까지 이중인격자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죽을 때까지 혼자 간직해야 할 숙제인 걸까.


가끔 의아했던 것은 그가 집에서 보여준 모습이 이전과 거의 변함없었다는 점이다. 그것도 능력인 걸까. 내 속은 곯아도 아이들에게 좋은 아빠로 그대로 남겨두는 게 옳은 걸까.



할아버지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어. 매번 눈물을 삼켰지. 그런 할아버지가 더 안타까웠다. 할아버지의 비애가 느껴졌어. 걸상에서 천천히 일어서더니 책장으로 향했지. 그곳에서 꺼낸 정지용 시집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었어. 할머니를 느끼려는 듯 천천히 책장을 들추며 어루만졌지. 잿빛 슬픔이 양쪽 어깨에 물드는 것 같았어. 카키색 카디건을 입은 할아버지의 어깨에 안정감 있게 자리한 내게도 할아버지의 비감이 전해졌으니까.



머리칼 여행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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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여행으로 연재가 많이 밀렸습니다. 다시 열심히 구상해서 끝까지 가보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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