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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칼 여행 5

by 물들래

K는 누구와 함께하는 것보다 평화롭게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편이야. 그렇다고 사회성이 떨어지는 건 아니지. 참석해야 할 모임이거나 꼭 가야 할 장소에서는 나름 분위기 조성에 이바지해. 모임에 어울리는 유머와 위트도 적당히 발휘할 줄 아는 인물이었으니까.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면 심심해 보이는 사람이지만 필요한 순간에 딱 맞는 풍미로 맛깔스러운 역할을 담당하는 인물이야. 그래서일까? 모임에 없으면 아쉬운 인물이지. 겉으로 요란하게 표현을 하진 않지만, K의 팬들이 은근히 많은 편이야. K는 그런데 아랑곳하지 않아. 혼자만의 세계가 너무 확실하고 자기 주관이 뚜렷해서 말이야. 가까이 가고 싶지만, 여전히 그와 거리를 좁히지 못하는 인물들이 주변에 많다는 걸 세밀한 머리칼인 난 잘 알고 있어.


K를 떠난 지 두 주일째야. K 생각이 오늘같이 많이 날 때면 종종 나만의 전용 영사기를 돌려봐. 지금 K는 어디서 무얼 하는지. 느낄 뿐 아니라 보이거든. 이 주일간 여느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소소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K가 그리워. 그중에서도 모발 냄새가 특히.


잠깐, 그런데 이건 뭐지? K의 냄새와 모발 향이 근방에서 느껴져. 지금 무척 가까운 곳에 있어. 별궁 길을 걸어오는 게 보이네. 아마 J 도서관 쪽을 향해 오는 게 분명해. K에게 사연 많은 이 길을 나 역시 무수히 따라다녔거든.


아! K가 점점 가까이 오고 있어. 순간이지만 방금 스쳐 지나갔어. 지금 L의 엄마가 할머니를 모시고 촬영장으로 가는 자동차 안이거든. 북촌로5길을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난, 할머니의 에메랄드색 스카프에 아늑하게 자리한 채 있거든. 차창 밖으로 순식간에 지나간 K는 즐겨 입는 검정 코트에 버버리 머플러를 착용하고 있었지. 머플러에서 풍기는 은은한 향기가 순식간에 전달됐어. K의 그 머플러에 감싸였던 순간의 감촉이 되살아났어.


K는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교육박물관 쪽 계단을 오르겠지. 그러고 보니 오늘 독서 모임이 있는 날이야. 갑자기 떠오른 인물이 있어. 독서 모임에 참여한 소수 인원 중 유난히 말이 많은 회원이야. 청각을 자극하는 고음이라 가끔은 입을 틀어막고 싶을 때가 있지. 분위기 파악 못 하는 사람이 더러 있잖아. 말할 때와 침묵할 때를 모르는 사람. 말해야 할 때 입 다물고, 침묵해야 할 때 말하는 대표적인 인물이었어. K가 가장 싫어하는 유형의 사람이지. K는 자연스럽게 떠버리의 입을 다물게 하는 재치를 소유한 인물이야. 이도 저도 못한 채, 괴로워하는 회원들의 고민을 단번에 잠재워주는 강점을 지닌 K를 그래서 사람들은 좋아하지.


물론 나 역시 K를 좋아했어. 나만이 아니었지. 머리칼 전체가 K의 손길을 항상 기다렸어. 샴푸 하며 부드럽게 거품을 내는 손길을 머리칼 모두가 좋아하지. 따뜻하게 마른 머리칼을 손가락빗으로 어루만질 때 모두 기분 좋은 어지럼증을 느끼곤 했어. 아무튼 모두가 K와 가능한 한 오래 함께하고 싶었지. 워낙 건강한 머리칼인 내가 K와 이렇게 빠르게 이별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예측할 수 없는 게 인생이듯 말이야. K 인생의 미미한 일부를 차지한 내가 한 치 앞을 어찌 알았겠어.


약 보름 전부터 L의 집에서 보낸 시간도 따지고 보면 그리 나쁘진 않았어. 다행히 L의 집이 북촌이라 오늘처럼 K와 스치듯 만날 수도 있었고 말이야. 난 지금 시니어 모델인 은발 할머니의 촬영 장소인 창덕궁 후원으로 이동 중이야.


창덕궁 후원은 작년 가을 K와 산책했던 기억이 있어서 오늘은 종일 K가 생각날 거 같아. K는 한 올 머리칼인 나를 잊은 지 오래겠지만. 난 결코 내 고향 K를 잊은 적이 없지.


머리칼 여행 4


다음 주 월요일에 6편, 계속 이어집니다.


가벼운 여행.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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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분위기와 어울리는 이미지 몇 컷 출처: 네이버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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