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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프러포즈

20세기 프러포즈, 21세기에 추억하다

by 물들래

아,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이 남자였구나. 가끔 현관이나 복도에서 마주친 기억이 있어서인지 익숙한 얼굴이었다. 조금도 불편하다거나 거부반응 같은 게 일지 않는 얼굴이었다. 말쑥한 인상에 침착한 색상의 옷차림 때문이었나.


이 남자가 오늘 오후 우리 과에 전화를 걸어 무자비하리만큼 당돌하게 날 만나야겠다던 남자라곤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의아심은 이내 남자의 첫마디로 사그라졌다.


"단도직입적으로 제 의사를 밝히죠. 청혼합니다. 칠 개월 동안 영희 씨를 관찰해 온 제 결론입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저 혼자만의 생각인 줄 압니다. 신중하게 생각하십시오. 영희 씨는 지혜로운 여잔 줄 알고 있습니다. 제 이 확고한 믿음을 부정해 버리는 일이 없길 바랍니다."


이 뜻밖의 말이 우습다거나 농담일 거라는 생각이 눈곱만큼도 들지 않음은 왜일까. 남자의 음성이 조금의 장난기도 섞지 않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였고, 상대방을 뚫어보는 것 같은 순하면서도 진지하게 빛나는 눈빛이 농담은 아닐 거라는 확신을 해 주었고, 너무나 떳떳하고 당연하게 얘기했으므로 꼭 그런 얘길 하게끔 처음부터 각본에 쓰인 인물 같았기 때문이다.


'칠 개월' '청혼' '지혜로운 여자' ….


참을 수가 없을 만큼 신경이 곤두섰다. 아니, 칠 개월을 그가 쥐도 새도 모르게 관찰한 결론이 청혼이라고. 난 지난 일곱 달을 무얼 하고 지냈나. 얼마나 정신 잃고 멍청했기에 한 남자의 눈길조차 의식 못 하고 이성에게 관찰당한 곤충처럼 이 백일을 넘게 지냈나. 소름이 끼칠 만큼 놀라운 사건이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을 이겨내면서 침착하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무서울 만큼 대단한 용기네요. 칠 개월 동안 김영희를 관찰한 결과가 과연 뭘까요? 영희란 여자에 대해서 어쩌면 그렇게 당당한 남자처럼 군림하려 드세요? 이건 정말 참을 수 없는 모욕이군요."


남자의 어느 이면에 저같이 자신감과 통하는 용기가 숨어있었을까. 말끔하고, 단정하게 다듬어진 첫인상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상당히 차가운 이성과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단단한 장벽의 성을 갖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생각한 것보다 무척 순하고 얌전하게 나오시는 기분이네요. 전 영희 씨가 상당히 역정 낼 걸 미리부터 걱정했는데, 한숨 놨습니다, 이젠! 제가 영희실 얼마큼 아느냐고요? 글쎄요. 청혼하는 남자가 알아야 할 최소한의 정도를 초월한 상태일 겁니다."


그는 너무나 완전하게 김영희 명세서를 암기하고 있었다. 영희는 몸속 깊숙이 감춰진 흉한 상처라도 내보인 것처럼 당황하면서 온몸을 떨었다. 언뜻 무서운 남자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분명히 남자가 보여준 건 진실일 텐데. 영희는 그저 그의 모습을 연극으로 치부해 버리고 싶었다.


'슛'하고 큐를 던지면 자기 몫의 연기와 대사를 NG 없이 완벽에 가까울 만큼 노련하게 해내는 배우처럼 그는 오늘 대단히 멋진 연기를 내게 보여준 거로 생각하고 싶었다. 비로소 청혼이라는 어휘가 주는 묘한 자극성이 주저 없이 싫었다.


"이제 저를 말해야겠군요. 영희 씨는 절 진지하게 알아두어야 할 필요성이 있는 여자니까요."


남자의 얘길 듣는 동안 영희는 그간 소중히 간직해 오던 자존의 벽이 서서히 부서지는 소릴 들었다. 그건 비애였고, 고통이었고, 한 남자의 눈부시게 화려한 용기에 대한 반발 비슷한 부르짖음이었다. 그가 갖추고 있는 결혼 조건이란, 소위 콧대 높은 여자가 말하는 완벽한 조건이었다. 당돌하고 자신감 넘치는 건방진 남자란 판단을 멋대로 해버린다면 내가 너무 순간에 충실한 여자가 되는 걸까. 남잔 너무 완벽한 게 흠일 정도로 완벽했다.


스물아홉, 스물하나에 신랑 각시놀음을 벌이자니 무조건 징그러운 일이었다. 아직 난 내 젊음을 실컷 누리고 싶었고, 해보고 싶은 건 무엇이든 꾸밈없이 다 해본 후 이제 정말 아쉬움이 없다고 느낄 때 비로소 결혼이란 걸 생각하고자 했다.

한편으론 결혼의 필요성을 통념 이상으로 느낄 때 결혼 적령기를 정하기로 생각해 온 터였다. 그러나 남자는 쉽게 물러날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당신의 당당함과 용기는 참으로 칭찬해 주고 싶은 마음이에요. 상대방의 의사가 어떨는지도 모르고 확신에 차서 거침없이 프러포즈하는 자세는 보통 남자에겐 어려운 일일 거로 생각했거든요. 그렇지만, 확고하게 제 의사를 말씀드려야겠어요. 지혜로운 여자가 택한 길이라고 생각하세요. 영흰 누구에게든 구속당하곤 살 수가 없어요. 조건에 의해 지배당하는 건 참을 수 없는 체질이어요. 영희는 니나(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작품 여주인공)의 자유를 사랑하는 여자예요. 오나시스가 재클린에게 내건 자유스러운 생활을 보장하는 조건을 높이 평가하는 여자가 바로 영희예요. 아직은, 정말 아직은 결혼과 영흴 연관 지어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좋은 여자 소개해 드리고 싶어요. 영희보다 지혜롭고 진주처럼 빛나는 여자가 당신에게 더 어울릴 거예요. 오늘 당신의 청혼은 우스운 표현일진 모르지만 아무래도 영희의 운명으로는 거절해야 할 것 같아요. 오늘 밤을 넘기고 새날을 맞이하면 오늘 받은 청혼을 잊어버릴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나는 침착하게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로 얘기할 수 있을 만큼 냉정해져 있었다. 그는 줄곧 내 마음속까지 관조하듯이 신중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경청했다.


"실컷 자유스럽되,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누리세요. 조건을 부여하는 일도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인간에겐 조건이 필요할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확신을 주고 싶습니다, 저에 대해서. 영희씰 맞을 준빈 언제라도 되어있습니다. 기다려 주겠다는 것도 조건으로 들린다면 곤란합니다."


순하게 웃는 남자의 얼굴에서 영희는 처음의 당돌함과는 견줄 수 없는 값지게 빛나는 진실을 순간적으로 읽었다. 남자의 시선을 겹쳐 받으며 나는 내 의지만은 굽힐 수 없어 하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두 가닥의 실이 엉키듯 답답하게 죄어옴을 의식했다.


새삼스럽게도 영희는 남자의 프러포즈로 말미암아 한 뼘쯤은 커지고 성숙한 여인 같아진 기분이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두 번째로 여자임을 확인할 수 있었던 이 당돌하고도 완벽한 사내의 프러포즈를 난 과연 오늘 밤을 넘기고 완전히 망각의 구렁으로 밀어 넣을 수 있을는지. 그건 어쩔 수 없는 내 자존의 고개가 뱀처럼 꿈틀거린 자아의 합리화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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