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詩

by 물들래

패키지 일본 여행 중이었어

어느 사원(寺院)을 둘러보았지

니콘수동카메라를 목에 걸고

무작위로 여행객 뒷모습 찍었어

그 사람 정서가 뒤태에 그대로 드러나지

놀라운 건 찍자마자 사진이 인화됐다는 것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꿈꾸고 있다는 걸 꿈속에서도 알았어

그이에게 뒷모습 사진을 건넸지

옆 사람이 한 장에 얼마라고 말했어

찍은 내가 사진값을 받은 게 아니고

그렇게 말한 사람이 챙겼지, 희한한 일이야


사원 경관을 둘러보고 있는데 가이드가

이곳이 패키지 관광의 마지막 일정이라네

공항으로 가는 관광버스에 오르길 종용했어

난 더 둘러보고 알아서 가겠다고 태연히 말했어

다음날 출근해야 하는 상황인데 말이야


몇 주 전 여행 중에도

마지막 날, 일행과 떨어져 일탈 행위를 했어

그때도 다음날 출근에 차질이 생겼고

성실하지 못함에 불만을 토로하던 동료가 떠올랐지

그런데 또다시 출근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든 거야

동료에겐 미안했지만 꼭 둘러보고 싶은 장소가 있었어


원하는 목적지에 갈 버스에 올랐고

몇 정거장인가 지나는데 예상과는 다른 거리풍경

버스 안에 있던 어떤 父子에게 길을 물었지

친절하게 안내하며 성경 같은 조그만 책을 내밀었어

받은 후, 즉시 책장을 넘겼어

흰 소 두 마리가 머리를 잘린 채 피 흘리는 사진,

손 잘린 사람, 팔 잘린 사람, 얼굴 잘린 사람 사진이 가득했어

당황한 채 망설이다가 버스 차창으로 시선을 돌렸어

그런데 책 속에서 본모습이 거리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거야

손 잘린 사람, 팔 잘린 사람, 얼굴 잘린 사람들이

하얀 옷 입고 몇 백 미터 행렬을 이루며 걷고 있었지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너무 끔찍해서 두 눈을 질끈 감았어


갑자기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차창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어, 몇 정거장을 지났을까

깔끔하게 정돈된 도로와 상가 주변에 경찰 두 명이 보였어

버스가 떠나려고 하는 순간, "스톱"을 외쳤고 내렸지

내린 뒤에 경찰을 향해 갔는지 공항버스를 탔는지 모르겠어

더 이상 꿈꾸지 않았어, 정거장에서 내린 후 잠에서 깼으니까


잠 깬 후 무엇을 해야 할까, 하루가 제대로 흘러갈까

관계의 단절일까, 불안한 마음일까, 새로운 변화일까

꿈의 의미를 곱씹을 틈 없이 하루가 어제처럼 빠르게 흘렀어

어제와 동일한 건 흐른다는 거야, 이 글을 쓰는 순간도 예외 없이

신체 한 부위를 절단한 채 지나가는 타인을 지켜보는 건 어떤 의미일까

어디까지 흐를까, 이대로 걸어도 될까, 바라보기만 해도 될까

이대로 계속 흐르기만 해도 되는 걸까, 언제 멈춰야 하는 걸까


꿈에 가까워지는 시간 앞에 섰다, 이제 눈 감을 때다, 부디 악몽에 시달리지 않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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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06 TOKYO, MEIJI JINGU &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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