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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들래 Feb 07. 2024

베토벤과 함께 한 아름다운 산책로

하일리겐슈타트를 찾아서...

베토벤이 작곡할 때 영감을 얻기 위해 찾은 산책로. 그는 산책로를 걸으며 시각과 촉각으로 보이고 느껴지는 자연을 토대로 '전원 교향곡'을 작곡했다는 산책로를 찾는 것이 비엔나 여행의 주요 미션 중 하나였다.


하일리겐슈타트로 이동하는 트램에서부터 숲속 산책하는 동안 베토벤의 사유가 담긴 명문장들을 기억 창고에서 꺼내보려 했지만 온전한 문장을 기억해 내지 못한 채 메모장을 펼쳐 보길 반복했다.


"전원에 있으면 내 불행한 청각도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거기서는 한 그루 한 그루의 나무가 나를 향해서 "신성하다, 신성하다" 하고 말을 걸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숲속의 환희와 황홀! 누가 감히 이런 것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  (1815년)

Beethovengang, 1190 Vienna, Austria, D 번 트램 Nussdorf Beethovengang 역에서 하차, 이때부터 무념무상으로 베토벤 선율에 빠진 채 걷기 시작했다. 일요일 해가 진후에 방문, 어둠에 잦아드는 숲길을 따라 걷기에는 너무 춥고 무서워서 월요일 다시 방문했다. 다행히 비까지 내리는 한적한 하오에 다시 찾아 진하게 베토벤과 밀회를 즐겼다. 


우산을 받쳐 들고 나무가 우거진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베토벤 기념 작은 공원이 나온다. 베토벤의 흉상도 만날 수 있다. 그를 만난 양 반갑게 한참을 그의 흉상 앞에서 대화했다. 주변에 아무도 없었기에 더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11월 한가운데에서의 시간을 내 어찌 잊으랴. 내 말을 분영 듣지 못할 거란 걸 알면서도 그의 표정이 왠지 내 마음을 다 안다는 듯, 이해한다는 듯했다. 그래서 그와 마주한 시간 동안만큼은 왠지 주변 세계까지도 고요한 평화로 나를 위로해 주는 듯 느껴졌다.

비 내리는 고요한 숲속에서 그와 은밀히 만나는 느낌이라 밀회란 표현이 자연스레 나오긴 했지만 뭐 대단한 이야기를 나눈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여행 일정에서 느낀 소소한 감정들, 만월이 뜨면 언제나 당신의 월광소나타를 찾아 들었고, 봄이 오면 스프링 소나타를 몇 날 며칠 틀어놓고 봄이 오는 소리에 귀 기울였으며, 제체시온에서 합창 교향곡을 들으며 눈시울 붉혔고, 아침에는 전원교향곡 전 악장을 들었으며 지금은 산책로를 따라 당신 생각하며 걷고 있노라고.


새들과 시냇물 흐르는 소리, 비에 젖은 축축한 낙엽 밟는 소리, 11월에 걸맞은 적당한 세기의 바람 소리를 당신은 오로지 촉각과 시각으로만(어쩌면 후각까지 사용했을 수도)  느꼈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많이 아려왔다고. 나도 그만큼은 아니지만 마음 아팠던 시간들이 많았다고. 내 얘기 한 번 들어볼 테냐고 물었다.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며 말해보라고 권하는 듯 느껴졌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힘들었던 일들을 푸념 섞은 음색으로 털어놓고 나니 돌아오는 길은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내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베토벤의 머릿속은 좀 복잡해졌을까. '미안해요, 베토벤. 제 이야긴 이제 빗물에 모두 떨궈내고 내일 당신을 찾아 푸념하는 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다시 감각들을 열어주세요. 오늘 내 얘기에 응해줘서 고마워요.' 


숲을 전능자라고 표현한 베토벤의 숲속에서 나 역시 행복했다. 한 그루 한 그루의 나무가 내게 다정하게 말했다. 고요한 숲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높은 곳에서 나를 감싸고 있을 고요와 눈 맞추기 위해서. 하늘에 걸린 나뭇잎과 그 사이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얼굴 가득 받아들였다. 잠시 우산을 떨어뜨린 채. 2023년 11월 13일, 그날은 촉촉한 비와 함께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추억으로 자리매김하리라.


베토벤이 동생들에게 쓴 유서의 일부를 옮겨본다.


……나는 너희들 두 사람을 나의 사소한 재산의 상속자로 인정한다. 성실하게 둘이서 나누어라. 합의하여 서로 돕거라. 내게 대한 너희들의 나쁜 소행은, 너희들도 알다시피 벌서 오래전에 이미 나는 용서하였다.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들이 나보다는 행복하고 고생이 덜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너희들의 아이들에게 도덕을 권하라. 도덕만이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돈이 아니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내가 비참한 지경에 빠져 있었을 때, 나를 받들어 준 것은 도덕이었다. 내가 자살로 인생을 끝마쳐 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내 예술의 덕택이기도 하지만, 또한 도덕의 덕택이기도 하다. 


…… 리히노프스키 공작이 내게 준 악기는 너희들 중의 누구든지 한 사람이 보존하여 주었으면 한다. 그러나 그 때문에 너희들 사이에 조금이라도 불화가 생겨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좀 더 유익한 일에 쓰일 수 있다면 곧 팔도록 하여라. 무덤 속에서라도 너희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나는 얼마나 행복하랴! 


……죽음은 나를 끝없는 고뇌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고 싶은 때에 언제든지 오라, 나는 죽음을 용감히 맞으리라. 그러면 잘들 있거라. 내가 죽은 뒤에도 나를 잊어버리지는 말아 다오. 살아 있는 동안에 나는 너희들을 항상 생각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너희들을 행복하게 해주고자 노력했으니까. 너희들이 나를 생각해 주는 게 마땅할 만도 하지 않느냐? 부디 행복하기 바란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하일리겐슈타트, 1802년 10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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