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들래 Feb 07. 2024

구본창의 항해

서울시립미술관 정동길 산책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 했다. 그러기가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 헤르만 헤세, 『데미안』(1919)


최근 독서모임에서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다루면서 이 구절을 다시 떠올렸는데 구본창 전시에서 그것도 입구에 자화상과 함께 이 글이 쓰여있었다. 구본창에게도 헤세의 이 명문장은 자신의 정체성을 탐색하는데 매우 큰 영향력을 미쳤으리라.

호기심의 방

구본창은 유년부터 사물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다. 그릇 조각부터 관심을 끄는 인쇄물, 손때 묻은 사물, 버려진 물건조차 진귀한 수집품이었고, 종종 촬영 대상이 될 때도 있었다. 


전시는 수집품을 진열한 호기심의 방에서부터 시작된다. 

호기심의 방은 근대 초기 유럽의 지배층과 학자들이 자신의 저택에 온갖 진귀한 사물들을 수집하여 진열했던 공간을 의미하는 '호기심의 방'에서 착안했다. 사물들은 구본창에게 자신의 마음에 귀 기울여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이뤄가도록 하는 중요한 표지 역할을 했던 거구나.

모험의 여정

1972년 남해 상주 바닷가에서 다짐했던 것처럼 자신에게 길을 찾아 독일로 먼 항해를 떠나는 모험을 감행했다. 독일에서의 작업은 자아를 찾고 낯선 땅에서 이방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하는 수단이었다. 


하나의 세계

1992년 나비 학자 석주명의 기사를 접한 이후 작업의 대상을 보편적 인간에서 곤충, 동물 등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로 확장하여 시리즈를 제작한다. 

특히 <숨> 시리즈는 오랜 시간 병상에 누워 있던 그의 아버지 몸에서 서서히 근육이 사라지고 수분이 빠져나가는 모습, 눈도 뜨지 못한 책 가까스로 내쉬는 숨을 직접적으로 기록했다는 점에서 사람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어머니의 죽음이 초기 작품에 영향을 미쳤듯이 아버지의 죽음 역시 작업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부모, 두 분 모두가 부재한다는 현실이 몇 겹의 고통으로 길게 이어지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고 이는 곧 동양의 자연관으로 귀결됐다.

영혼의 사원

<문라이징 Ⅲ>은 각기 다른 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 호암미술관, 호림박물관, 아모레 퍼시픽미술관, 파리 국립기메동양박물관, 교토 고려미술관, 도쿄 일본민예관, 오사카시립동양도자박물관 등)에 있는 달 항아리를 다양한 흑백조로 촬영해 마치 달이 뜨고 지는 듯한 풍경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열린 방

그의 마지막 세션에서도 그는 헤르만 헤세를 언급한다. "아무래도 좋은 운명 하나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 운명을 자신 속에서 완전히 그리고 굴절 없이 다 살아 내는 일"은 여전히 진행 중임을 알리는...


구본창의 항해 전시는 시간을 넉넉하게 준비해야 한다. 빠른 시간 내 완수할 수 있는 항해가 아니다. 그의 지난날을 사물들과 그의 사진과 다양한 예술 작품을 통해 만나기 위해서는 여유 있는 시간은 필수다. 전시장 입구를 들어설 때, 2층에서 입구를 내려다볼 때, 전시를 다 둘러보고 나오면서 느낀 것은, 전시 제목 참 잘 붙였다는 것! 


자, 이제 당신이 구본창과 함께 항해를 즐길 차례이다. 멋진 항해가 되길 바란다.  전시는 3월 10일까지다.

작가의 이전글 살롱 드 경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