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티나무 아래서

바람 냄새, 햇살 냄새, 느티나무 냄새

by 물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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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리오, 일어나야지?


치리오는 좀 더 자고 싶은데 엄마가 말했어요. 이불속에서 얼굴만 빼꼼히 내밀고 엄마를 쳐다보았어요. 엄마가 절 보고 빙그레 웃었어요. 그 웃음 속에서 사랑이 느껴졌어요. 참 행복한 아침입니다.


오늘은 가족과 함께 자연 속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한 날이에요. 차창 가로 쏟아지는 햇볕에 졸음이 몰려왔지만 누나와 형이 머리와 목을 쓰다듬어 주며 계속 말을 걸었어요. 누나의 부드러운 손길이 머리와 등에, 목과 가슴에 닿을 때의 감촉을 참 좋아하죠. 요즈음 부쩍 축구와 농구에 빠진 형아는 누나의 손길에 비해 좀 거칠어요. 그렇지만 내 촉촉한 코를 톡톡 건드려주는 검지와 등을 쓰다듬어주는 따뜻한 손끝에서 형아의 온정이 느껴졌어요.


드디어 춘천 할아버지 댁에 도착했어요. 느티나무 그늘 아래서 엄마가 말했어요.


-- 이 느티나무 그늘이 정말 좋구나. 세월이 흐르면 이 나무 그늘이 더 풍성해지겠지?


그러면서 차 트렁크에서 커다란 돗자리를 가져다가 펼쳐 놓고는 가족들 모두 누웠어요.


-- 바람이 정말 시원하구나!


엄마의 말에 누나가 말했죠.


-- 하늘이 정말 파랗다. 완전 바다를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야.


바위 위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내게 형아가 말했어요.

-- 치리오! 이리 와.


형아는 내 배를 살살 간질여 주었어요. 형아는 내가 좋아하는 걸 빨리 알거든요. 돗자리에 누워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하늘바라기 하고 있는 가족과 함께여서 정말 행복했어요. 형 옆에 누워있던 아빠도 내 목덜미를 살살 어루만져 주다가 무심하게 말했어요.


-- 바람 냄새, 햇살 냄새, 느티나무 냄새 모두 좋구나.


아빠 말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방금 치리오도 그 냄새를 코끝으로 맡았거든요. 가족 중에 가장 말이 없는 아빠랑 갑자기 가까워진 기분이었어요. 형아는 햇살에서 냄새가 난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어요.

-- 고요하게 눈을 감고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여봐. 그러다 보면 코끝으로 훅 하고 느껴지는 냄새가 있을 거다. 하루아침에 경험하긴 힘들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형아 표정을 어디서 본듯해서 기억을 더듬어봤어요. 아, 그래요. 몇 년 전 아빠가 뜨거운 북어 해장국 먹으며 '아, 시원하다' 했을 때 지었던 표정이랑 거의 비슷했어요. 아빠는 형아를 보며 빙그레 웃었어요. 그런데 치리오 역시 해장국을 시원하다고 한 아빠의 말이 이해가 안 되긴 마찬가지였죠. 뜨거운 건 딱 질색이니까요.


곁에서 듣고 있던 누나가 조용히 눈을 감는 걸 보니까 왠지 곧 햇살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누나는 요새 나에게 쏟던 애정을 남자친구 환이 형에게 더 쏟는 것 같았어요. 오늘같이 햇살 좋은 날, 데이트가 더 하고 싶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춘천 나들이는 한 달 전부터 계획한 가족행사라서 취소할 수 없었죠. 어쩜 눈 감고 환이 형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지난주에 가족들에게 소개하더라고요. 여자친구가 아끼는 반려견 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걸까요? 처음부터 친근하게 다가오더라고요. 손끝도 다정했고요. 그래도 누나가 환이 형이랑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 그만큼 치에게 소홀해질 수밖에 없으니까 섭섭했죠.

물론 여고 때도 방송반 활동으로 소홀했지만 그때는 지금에 비하면 약과였죠. 대학생이 돼서는 너무 늦게 귀가해서 누나랑 보내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으니까요. 느티나무 그늘 아래서 눈 감고 있는 누나 얼굴을 오래 쳐다보았지만 치리오 시선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누나가 야속했어요. 예전에는 시선을 바로 알아채고 안아주었거든요. 정해진 시간에 산책도 자주 시켜주고요. 그런데 환이 형과 교제를 시작한 뒤부터 치에게 소홀해진 건 확실해요. 오늘 같은 날이라도 치리오와 놀아주길 바랐는데 말이죠. 포기할 치리오가 아니죠. 누나 배 위로 살포시 점프해서 엎드렸죠. 누나가 상냥한 손길로 치리오 머리에서부터 등을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했어요. 손끝에서 느껴지는 애정엔 변함이 없었습니다. 휴우, 정말 다행이에요. 환이 형을 질투하고 있는 치리오를 확실하게 깨달았어요.


-- 치리오, 사랑해.


- 누나, 치리오도 사랑해.


마음을 다해 눈빛으로 전달했어요. 그래요. 누나도 이제 사랑할 나이잖아요. 누나보다 어른인 치가 이해해야죠, 어쩌겠어요. 안 그래요? 이제 열 살이 된 치리오는 사람 나이로 치면 노년에 접어든 셈이죠. 이렇게 마음을 고쳐먹으니까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어요. 뭐든 마음먹기 달렸다고 했던 엄마 말이 진리였어요.

우물가에 모두 모여서 할머니가 따온 상추를 씻었어요. 집으로 돌아올 때 할머니가 상추를 얼마나 싸줬는지 엄마는 일주일 내내 상추 샐러드, 상추쌈, 상추 겉절이를 식탁 위에 올리는 거예요. 식탁 아래 앉아 있는 치에게 엄마는 상추 꽁다리를 잘라 주었는데 얼마나 고소하던지 냠냠거리며 먹었어요.


그런데 형아는 상추를 싫어했어요. 오이만 조금 먹었을 뿐이에요. 형아는 야채보다 고기를 더 좋아해요. 치는 주는 대로 잘 먹는 편이지만 형아처럼 고기를 좀 더 좋아하죠.


할머니가 차려준 밥상은 정말 푸짐하고 화려했어요. 가족들 건강을 생각해서 야채와 고기를 듬뿍 차렸어요. 고기 굽는 냄새가 느티나무 그늘을 벗어나 마당을 가득 채웠어요. 냄새 맡은 치리오가 가만히 있을 수 없죠. 모처럼 대가족과 함께 맛있는 식사를 마치고 모처럼 누나와 산책을 나섰어요.


밭에서는 상추, 고추, 오이, 또 뭐더라? 많은 농작물이 자라고 있더라고요. 무더운 햇볕이 내리쬐긴 했지만 언제 또 춘천을 오게 될지 몰라 열심히 스트레칭하며 산책했어요. 한참을 달리다 보니 덥고 힘들었어요. 시원한 공간으로 이동했어요. 할아버지가 질서 있게 싸놓은 장작더미가 놓여있는 곳인데 냉장고처럼 시원했어요. 거기가 시원한 줄 어떻게 아느냐고요? 강아지라고 무시하지 말아요. 해가 쨍쨍한 곳에 계속 서있는 걸 좋아하는 강아지가 어디 있겠어요. 시원한 곳을 찾게 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죠. 그 정도는 우리 강아지들도 안다니까요.


춘천 할아버지가 치리오 다리를 보고 너무 가늘다고 했는데 다음에 갈 땐 튼튼해져서 가야겠어요. 사실 가늘긴 하지만 열심히 달려서 탄탄한 근육질 다리라는 걸 사람들은 잘 모르더라고요. 할아버지 핑계 대고 이참에 누나랑 형한테 부탁을 해야겠어요. 치리오 다리 건강을 위해서 앞으로 자주 산책시켜 줄 거죠?


치리오는 달리기를 정말 잘합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실감 날 정도로요. 산책 나가서 차 없는 공간에 사이줄을 풀어주면 지치는 기색 없이 미친 듯 뛰어다니곤 하니까요. 한참 뛰다가 멈추죠. 그리고 뒤를 돌아봅니다. 너무 빠른 치를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해야 하니까요. 치리오 뒤에서 따라오는 누나를 보고 씩 웃어주고는 다시 달리기 시작합니다. 형아가 반려견 달리기 대회 있으면 금메달은 치리오 차지라고 하는데 치가 생각해도 금메달은 치리오 목에 걸어야 제격이죠. 치보다 빠른 강아지가 있다면 도전해 볼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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