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사랑을 다시 확인했어요
가족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날마다 행복한 건 아니죠. 가족 모두 사정이 있어서 집을 자주 비울 때면 화가 나서 침대에 오줌을 지려놓곤 했죠. 혹여 그날 아침 시트를 새로 갈았을 경우엔 오줌을 싸는 순간 '아뿔싸' 이건 아닌데 싶지만 어쩌겠어요. 엎질러진 물인걸요. 최고로 무섭게 변한 엄마에게 야단맞을 각오를 단단히 하죠.
치리오를 엄청 사랑하던 누나가 계속 늦게 들어왔어요. 치리오랑 눈 맞춤도 짧아지고 피곤한지 금세 잠들어버렸어요. 치도 너무 화가 나서 누나가 가장 아끼던 비싼 신발을 아작아작 물어뜯어놓았죠. 치가 얼마나 속상한지 알게 하고 싶었으니까요. 그런데 누나는 그 뒤로 치를 더 미워하는 것 같았어요. 누나의 사랑을 되찾기 위한 방법이었는데 치리오 생각이 짧았나 봅니다.
보통 주말 저녁엔 거실에서 가족 영화 보는 게 자연스러운 일상인데요. 갑자기 엄마가 남대문 야시장에 다녀오자고 하더라고요. 뛸 듯이 기뻤지요. 밤 산책이라니요? 그것도 야시장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데 새로운 경험할 생각에 한껏 부풀었어요. 그런데 야시장에는 장사꾼들이 많이 모이는 시간이고 쇼핑객 사이에서 이리저리 치일 게 뻔하다며 치리오를 살살 달래더라고요. 촉촉한 눈망울로 간절하게 데려가 달라고 애원했지만 금세 다녀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현관문 닫히는 순간의 절망감이라니요.
그날 밤 너무 늦은 가족들의 귀가에 화가 나서 두루마리 휴지를 풀어헤쳐서 집안 곳곳에 흩뿌려 놓았어요. 치리오의 주특기죠. 야단맞는다는 걸 알면서 이날도 예외가 아니었죠. '두루마리 휴지 풀어헤쳐' 놀이가 스트레스 푸는 데 은근 도움이 되거든요. 돌아온 가족들은 엉망이 된 집안을 보고 처음에는 너무 놀라서 야단쳤지만, 시간이 좀 흐른 뒤 미안하다면서 사과하죠. 그리고 다음날 좀 더 길게 산책을 시켜주기도 해요. 그러면 오히려 치리오가 미안해지죠. 다시 침대 시트 걷어서 빨고 집안 청소하는 엄마에게 특히 더요. 가족들이 거들긴 하지만 그래도 엄마가 제일 힘들다는 걸 치리오가 왜 모르겠어요.
알면서도 치리오는 또 바보처럼 실수합니다. 엄마가 너무 바빠서 여러 날 치에게 관심을 기울여주지 않을 때는 또 심술을 부립니다. 이불 위에서 오줌 싸는 순간엔 치도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러면 안 되는데 깨끗한 이불 위에 있으면 그냥 이상하게 오줌이 나오는 거예요. 그 순간에 엄마 얼굴은 세상에서 가장 무섭게 변하죠. 사자 얼굴이 저럴까요?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사납고 무서운 동물을 대표하니까요.
밖에서 너무 힘들었던 날엔 치리오 엉덩이를 세게 때릴 때가 있어요. 맞을 짓을 했지만 너무 아팠답니다. 아픈 건 둘째치고 슬펐어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치리오를 때린 엄마가 미워서요. 엄마에게 맞을 짓 한 치리오가 미워서요. 지금 생각하면 엄마 마음 아프게 한 게 너무 속상하고 후회됩니다. 치리오를 야단치고 나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엄마는 치를 어느 때보다 따뜻하게 품어 안으며,
-- 아팠지, 치리오! 미안해.
사과하고 엉덩이를 어루만지죠. 치리오를 야단친 엄마 마음은 치보다 더 아프고 힘들었던 겁니다.
- 아뇨, 엄마. 치리오가 더 미안해요.
누나만 집에 남고 가족 모두 외출한 날, 치리오에게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어요. 여고생 누나가 공부에 방송반 활동에 바쁜 건 알겠지만 그래도 치리오와 단둘이 집에 있는 날엔 관심의 눈길을 보내줘야 하잖아요. 잠깐 나랑 놀아주는가 싶었는데 웬걸요. 친구 전화받고 얼마나 오랫동안 통화를 하던지요. 건성으로 내 머리를 만지고 있다는 게 느껴졌어요. 속상했죠. 화가 나더라고요. 그런데도 계속 이어지는 통화에 더 이상은 못 참겠더라고요. 나도 모르게 앞다리로 카펫을 긁어대며 신경질적으로 파헤쳤어요. 갑자기 지독한 통증을 느꼈어요. 두 번째 발톱이 빠졌나 봐요. 피가 엄청나게 쏟아졌어요. 너무 아파서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어요. 끙끙 앓는 소리를 내니까 누나가,
-- 으악!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전화기를 집어던지더라고요. 그 순간 속으로는 진작 나한테 집중했다면 이런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 어떡해, 어떡해
피로 얼룩진 카펫을 보고 놀란 누나는 사색이 된 얼굴로 당황했지만 이내 침착하게 치리오 발에 휴지를 감고 꼭 감싸 쥔 채 계속 울었어요. 겁이 많은 치리오도 이만저만 놀란 게 아니었으니까요.
-- 치리오, 미안해, 누나가 정말 미안해
누나가 그렇게 격하게 우는 건 처음 봤어요. 화장실로 달려가 작은 수건 한 장을 꺼내와서 치리오 발을 단단하게 여민 후 병원으로 달려갔어요. 응급처치를 제대로 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똑똑한 누나라 역시 달랐어요. 병원에 도착해서 치료받는 동안 누나는 안절부절못한 채 계속 울었죠.
치리오의 오해였어요. 치리오를 향한 누나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는 걸 확인했으니까요. 발톱 사건 이후 며칠간은 산책할 수 없어서 좀 우울했지만 가족 모두의 사랑을 다시 확인한 건 큰 수확이었죠. 치리오를 향한 가족 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습니다.
중학생인 승현 형아는 워낙 활동적이고 운동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주변에 친구들이 많아요. 운동 중에 다친 적도 많아서 엄마가 늘 걱정을 합니다. 과격한 스포츠맨인 형아가 피아노까지 연주한다는 건 멋진 일 아닌가요. 활동적인 형답게 연주도 박력 있죠. 언젠가 엄마가 차분한 곡을 너무 활기차게 연주하는 거 아니냐고 했더니 곧바로 날아온 형아의 대답은,
-- 승현이의 스타일로 이해하고 감상하시죠.
형아는 아무래도 공부보다는 예체능 쪽에 강했어요. 그렇다고 공부를 못하는 게 아니었거든요. 학생 신분에 맞게 기본 이상은 했으니까요. 그 기본이 누구의 기준인가에 따라 다르겠지만요. 아빠의 기준은 확실히 높았거든요. 엄마도 형의 입장에 서서 아빠를 설득하곤 했지만 결국 터질 게 터지고야 말았어요. 아빠와 형의 마찰이 생긴 지점은 컴퓨터 게임이었어요. 약속했던 게임 시간을 넘겼을 때 참다못한 아빠가 그만하고 공부하라고 명령했죠. 형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성적을 요구하면서요. 형은 처음으로 아빠에게 반항했어요. 살벌해진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나요?
다음날 평상시와 다름없이 등교했지만 형아는 학교에 가지 않았어요. 담임선생님의 연락을 받고서야 가출이란 걸 알았죠. 치리오도 놀랐는데 엄마 아빠의 충격은 엄청났죠. 다행히 형아는 춘천 할아버지 댁에 가있었고 다음날, 하루 만의 가출을 끝내고 귀가했어요. 아빠와 대화 후 합의점을 찾아 이전의 평화를 되찾은 듯했어요. 그러나 이전의 승현 형아는 분명 아니었어요. 뭔가 어른스러워졌다고 해야 할까요? 형아가 확실히 성숙해진 것 같았거든요. 가출 사건 뒤에 치리오는 형아 방을 자주 찾았고 스킨십을 많이 했어요. 치리오를 안고 있으면 형아가 마음에 안정감을 찾는다는 걸 느꼈으니까요. 형아에게 도움이 됐다는 게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