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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 굽는 타자기 Aug 08. 2020

자살 충동 이후 달라진 세 가지

3년 전, 나는 홀로 남은 집에서 거실 창밖을 보며 생각했다. 내가 22층 아래로 떨어지는 건 남편에게 완벽한 복수가 될 거라고. 극단적인 생각을 행동에 옮기려는 순간,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마지막으로 가시 돋은 말로 남편을 할퀴고 싶었는데 난 어느새 그에게 제발 붙잡아달라고 애걸하고 있었다.

“나 지금 죽고 싶은 생각밖에 안 들어. 무서워. 무섭다고!”

다급해진 남편은 고함을 질렀다.

“꾸마 엄마, 정신 차려!”

그래, 나는 누군가의 아내이기도 했지만 누군가의 엄마였다. 정신 차리라는 남편의 말에, 내 딸의 얼굴이 너무나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순간 죽고자 하는 마음이 눈 녹듯이 사그라들고 눈물만 흘러내렸다.    




5년 전부터 사업을 시작하고 재택근무를 하게 된 남편과 참 많이도 싸웠다. 집에서 같이 일하는데 나 혼자 집안일을 다 하는 것 같아서 억울하고 분통이 터졌다. 차라리 눈앞에 남편이 보이지만 않는다면 괜찮을 것 같았는데 어떤 날은 남편을 투명 인간 취급하며 무시하고 등 돌렸다. 그 당시 우리 부부는 사소한 행동 하나, 말 한마디로도 충분히 싸울 수 있었다. 상대가 어떤 마음인지는 몰랐지만 어떻게 하면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어느 날, 남편이 그나마 해주기로 한 화장실 청소도 하지 않길래 일하는 남편 뒤통수에 대고 쏘아붙였다.

“시간 있으면 화장실 청소 좀 해!”

“내가 놀고 있어? 놀고 있냐고!”

“아니, 내가 분명히 시간 있으면 해달라고 했잖아. 놀고 있다고 했어? 그리고 화장실 청소는 자기가 하기로 했는데 왜 안 해? 더러운 거 안 보여? 안 보이냐고! 왜 나만...”

“바쁘다고 했잖아. 그만해. 그만하자고!”


매번 싸우고 화가 난 남편은 작업실 문을 닫아버리거나 집 밖을 나갔다. 그게 나는 죽을 만큼 싫었다. 그때 난 버림받은 것과 다름없었다. 목놓아 울고 있었지만 아무도 내 눈물에, 내 슬픔에 관심이 없었다. 나는 철저히 혼자였다.    


하지만 3년 전 자살 충동 이후로 나는 조금씩 달라졌다. 자살 직전까지 갔던 내가 뭔들 못할까 싶었다. 그룹 심리상담과 부부학교를 통해서 ‘이렇게 살다 간 죽기 전에 남편에게 내가 듣고 싶은 말을 절대로 들을 수 없겠구나.’ 한 가지 깨달음을 얻게 됐다. 그래서 나 혼자 집안일을 끝냈는데 일언반구 없는 남편에게 용기 내어 말했다.

“꾸마 아빠, 설거지 안 해도 좋은데 내가 설거지하고 나면 그냥 고생했다고 말해줄 수 없어?”

“어, 어...”

그날 내 말에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줄 알았는데 다음날 설거지를 끝낸 나에게 남편이 말했다.

“꾸마 엄마, 고생했어.”  

영혼 없는 그 말 한마디가 참 고마웠다. 나를 처음으로 인정해주는 것 같아서, 그리고 굳이 해주지 않아도 되는데 남편도 노력하고 있는 것 같아서.


지금은 내가  설거지하고 있노라면 남편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하려고 했는데 왜 했어...”

이제 너스레까지 떠는 경지가 된 남편이 되었다. 전보다 요리든, 설거지든, 아이 목욕이든 많이 도와주는 남편의 모습에 나 역시 고생했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처음엔 고맙다고, 고생했다는 말하기까지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했는데 다행히 지금은 약간의 숨 돌리기 정도로 가능해졌다.     




내가 죽기 전에 남편에게 원하는 말을 못 들을 것 같다는 공포에 가까운 감정은 ‘미니멀 라이프’로까지 이어졌다. 아이가 커갈수록 짐은 늘어가자 20평대 집은 점점 좁게 느껴졌고 30평대로 이사 가지 못하는 현실에 원망의 화살은 고스란히 남편에게 향했다. 하지만 우리 집보다 작은 집에 살면서도 필요한 물건만 갖춘 채 깔끔하게 사는 친구 집에 놀러 가면서 그 친구의 삶을 동경하게 되었다.     


옷 100여 벌, 책 500여 권, 필요 없어진 책장과 선반, 낡은 전자제품, 유통기한 지난 음식, 아이 장난감 등 2년 넘게 참 많이 비웠다. 버리고 나니 내가 좋아하는 것과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그리고 내가 해결하지 못하는 친정 문제로 힘들었던 시절, 비움은 유일하게 마음을 비울 수 있는 소중한 일이었다.     


집안 비우기는 관계의 미니멀로 번져서 만날 때마다 상처받기 일쑤였던 대학 동기들 계모임을 1년 고민 끝에 어렵사리 탈퇴했다. 처음에 무리에서 혼자 나와서 소외감을 느껴보니 괜히 나왔나 싶을 정도로 상실감이 컸다. 하지만 더는 설레지 않는 만남을 지속하면서 나를 괴롭히고 싶지 않다는 그 결단, 그 시작은 날 성숙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집이 정비될 무렵, 당시 6살이었던 딸이 내게 물었다.

“엄마는 꿈이 뭐야?”

“...”

나는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뭔가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10년 넘게 방송 구성작가로 일해왔는데 내게 꿈이라니... 아마도 별 뜻 없었던 아이의 질문에 내가 선뜻 대답하기 힘들고 괴롭기까지 했던 건 지금 하는 일이 진정한 내 꿈이 아니라는 것과 내 안에 숨겨진 꿈이 있다는 걸 들켜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뒤 순진무구한 아이의 질문에 답을 찾듯이 지금 하지 않으면 10년 뒤, 20년 뒤 후회할 것 같은 일을 생각해 봤다. 20년 전 막연하게 생각해온 호기로운 꿈, 바로 드라마 작가였다.     


2년에 걸쳐 매주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교육원 기초반, 연수반을 힘들게 수료했지만 안타깝게도 전문반 문턱을 넘지 못했다. 내 실력을 알아주지 않고 상급반에 올려주지 않은 연수반 선생님을 원망하는 것도 잠시, 현재 8개월 넘게 그 선생님이 만들어주신 AS반에서 매주 숙제를 성실히 하는 중이다. 여전히 좋은 작품 쓰기는 어렵고 제대로 공모전에 도전도 하지 못한 습작생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2년 전에 아이에게 말하지 못했던 엄마의 꿈을 이제 당당히 말할 수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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