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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 굽는 타자기 Jan 29. 2020

그래도 나는 엄마 딸이니까요

"엄마, 근데 꾸마 돌잔치에 친정 식구들  안 왔어?"


이번 구정 설에 난 친정에서 전을 부치다가 소리 질렀다. 곧 초등학생이 되는 꾸마를 보며 즐거워하는 친정 엄마에게 찬물을 끼얹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다만 7년에 맺혔던 내 한을 풀고 싶었다. 옆에서 날 지켜보던 남편이 지난 일을 왜 그렇게 끄집어내냐고 만류했지만 소용없었다.


"시부모님 두 분 모두 병원에 계셔서 못 오셔도 시댁 형제들, 조카들까지 줄줄이 다 왔어. 나만 아무도 없었어."


내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친정엄마가 울먹이며 말했다.


"가야 했는데 그때 못 가서 미안타."


친정엄마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들으려고 했던 얘기는 아니었다. 쌈닭처럼 달려들던 난 엄마의 미안하다는 그 말에 전의를 상실한 것처럼 할 말을 잃었다.


7년 전에 딸아이 돌잔치에 남편 쪽 시댁 식구부터 70여 명의 회사 사람들로 붐볐다. 그래서 괜찮은 줄 알았다. 친정 식구들이 오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었으니까 기대하지 않았다.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실망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3년 전 혼자 집에 있던 어느 날 샤워를 하다가 나는 아이 돌잔치 때를 떠올리며 엉엉 소리 내며 울었다.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나는 하나도 괜찮지 않았던 거였다. 당시 느꼈던 내 감정이 철저히 혼자였음을 느꼈다.


돌잔치 때 사진 촬영 담당자가 시댁 식구들과 단체 컷을 찍고 나서 그가  "친정 식구들이랑 찍을게요." 했을 때 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좋은 날이었으니까 울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울음을 참았다.


돌잔치 날에도, 샤워 부스에서 울던 날에도, 지금도 머리로는 친정식구들이 그날 오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다고 이해했다. 하지만 내내 가슴에 맺혀있었다가 이렇게 불쑥 내 치부를 보여줄 거라고 나 역시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거슬러 올라가 보니 내가 아기를 막 낳았을 때도, 자취방 이사하는 날에도 엄마와 아빠가 없었다. 멀리 부산에 계시니까 바로 올 수 없는 거라고 그때도 머리로 이해했다. 하지만 여전히 가슴으로 이해하지 못했고 마음이 시렸다.


누구는 내게 이미 지난 일을 얘기해봤자 뭐 하냐고 그럴 것이고 또 누구는 뒤끝이 정말 장난이 아니라고 하겠지. 하지만 적어도 이런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고 나니 후련하다. 홀로 외로웠던 내 마음을 조금이나마 인정해준 것 같기에. 고로 뒤끝 있다고 해도 오래 묵혀둔 내 한을 풀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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