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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 굽는 타자기 Nov 14. 2020

꿈을 꾸고 있었지만 불행했던 이유

남들 앞에서 괜찮은 척 했지만 나는 괜찮지 않았다.

올해 코로나로 인해 모두 집콕하고 있을 무렵 내 우울증은 심해졌다. 손쉬운 클릭 몇 번으로 온라인으로 생필품 쇼핑을 하면 4~5일 집 밖을 나가지 않아도 생활이 가능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나는 어쩌면 내 마음에 내가 일하지 못하는 이유는 코로나 때문이라고 내가 아니라 뭔가를 탓해야 조금은 떳떳해질 수 있었다. 


한 달 반 전만 하더라도 집 밖을 나가는 건 내게 있어서 고통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이러다 코로나 걸리면 어떡해? 내가 걸리면 남편과 아이는 어떻게 되고? 집에 있는 게 안전하다는 생각밖에 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날 불현듯 다짐했다. 이렇게 있다간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겠다, 뭐라도 해보자고. 그리고 나를 방치하지 말자고.


뭔가 하고자 하는 마음을 결정하고 시작할 수 있었던 건 방송작가협회에서 뉴미디어 트렌드를 알아보는 이틀 간의 강의 덕분이었다. 평소 뭔가 배워두면 어디 써먹을 곳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쉽게 신청은 했는데 전날부터 갈등은 시작됐다. 코로나 이전에 종종 혼자 대중교통을 타고 혼밥을 먹었던 나의 평범한 일상이 코로나 이후 가장 무서운 일이 되었다. 서울까지 강의 가려면 대중교통으로 어떻게 가나? 강의 중간에 혼자 어떻게 밥을 먹을까? 등등.


내게 아주 힘든 일이 된 일. 강의를 듣기 위해 대중교통을 타고 오전 오후 강의 사이에 혼자 밥을 먹으면서 깨달았다. 다른 직장인들은 코로나 이전과 똑같이 대중교통을 타고 음식점에서 점심먹고 있었다는 걸. 다들 생업을 위해 그까짓 코로나 걱정은 저 멀리 던져버린 직장인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미 내 일상이 코로나로 인해 아주 많이 무너지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2년 가까이 드라마 공부를 하느라 나는 일하지 않아도 꿈을 꾸고 있다고 스스로 위안을 느꼈다. 하지만 영화 (버닝)의 주인공이 다른 사람에게 작가 지망생이라고 허울 좋게 소개하지만 실제론 글을 전혀 쓰지 않았던 것처럼 나도 그랬다. 드라마 작가 지망생이지만 나는 즐기면서 드라마를 제대로 보지도 못했고 내 드라마를 쓰지 못했다. 결국 남들에게 꿈을 꾸는 사람이라고 소개했지만 정작 나는 꿈꾸고 있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집 밖으로 한 걸음 걸어 나가기도 힘들면서도 남들에게 꿈꾸는 사람이 된다면 나는 조금은 있어 보이니까 괜찮은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불행했다.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아무튼 뉴미디어 시대 방송작가의 역량을 키우기 위한 강의를 들으면서 가슴이 뛰고 있음을 느꼈다. 그래, 나는 드라마 작가는 되지 못했지만 10년 넘게 방송 밥을 먹었던 방송작가였다. 그런데 왜 내가 잘하는 일을 놔두고 굳이 잘하지 못하는 일을 하겠다고 정체되어 있었던가. 스스로를 돌아보게 했다.


남편이 주는 월급으로 충분하다고, 나는 이 정도 삶에 만족한다는 안일한 생각들은 나를 좀먹고 있었다. 전혀 괜찮지 않았던 내가 괜찮다고 남들에게 포장하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만약 작은 일이라도 방송일이 들어온다면 해보자는 마음이 비로소 강의를 다 듣고 나서야 생겼다. 내가 집 밖을 나서서 대중교통을 타고 쇼핑몰에서 혼자 밥을 먹으면서, 별 일 아닌 일상을 정말 어렵게 하나씩 해보면서 내가 알을 깨고 나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마음먹고 불과 며칠 뒤에 동시에 일이 들어왔다. 하나는 선배 작가님이 못하게 됐다고 대신하라는 단발성 행사 프로그램이었고 또 하나는 대학 동기 친구가 1분짜리 스팟과 전혀 해보지 않았던 3분 애니메이션 제작일이었다. 무슨 일이든 해보자고 일렁이는 내 마음이 있었기에 흔쾌히 한다고 했다.


경단녀에 가까웠던 터라 시작은 했으나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잘 모르고 잘할 수 없다는 걸 비관하기엔 스스로에게 쪽팔렸다. 모르면 찾고 공부하자고 숱한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15년 전 처음 호기롭던 막내작가의 초심으로 돌아갔다.


누가 억지로 시키지 않았지만 이미 하기로 한 일이기에 책임을 져야 했기에 적어도 일을 소개해준 선배에게나 동기에게 부끄럽지 않게 일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나를 짓눌렀다. 하지만 부담은 되더라도 다행히 10년 넘게 해왔던 몸에 익은 일이었기에 페이스를 찾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 달 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밤낮으로 일하고 심지어 꿈속에서도 구성을 고민했다. 경단녀 방송 작가에게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건 그 일이 기존 다른 작가들이 기피할 만큼 문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걸 깨닫는 데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원고를 썼으나 재작업을 수차례 해야 했고 적은 출연료로 A급 강사를 섭외해야 다. 내가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매일 나의 한계를 느끼고 일 하느라 잠을 못 잔 게 아니라 조금이라도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나의 처절한 몸부림이 시작됐다.


어떤 날은 나는 원래 잘할 순 없지만 노력하는 거라고 스스로 아예 내려놓는 경지에 이르렀고, 또 어떤 날은 선배 작가님의 조언처럼 10번 아니 100번도 다시 써보자는 패기 치솟는 날도 있었다. 내 작은 실수가 너무나 치명적으로 다가왔을 땐 또다시 자살충동까지 느끼며 괴로웠다. 할 수만 있다면 다시 알 속에 갇혀서 나는 여기가 안전하다고 착각하면서 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알을 깨고 나왔으니 다시 깨진 알 속에 나를 다시 숨길 수 없었다.  


이틀 밤을 새우며 2시간 반 방송 원고가 34장으로 빼곡하게 채워졌던 새벽, 나는 엉엉 홀로 울었다. 스스로 감격할 정도로 원고가 좋았다기보다 내가 이렇게 방송 대본을 쓸 수 있었던 작가였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기에 그냥 좋았다. 누가 잘했다고 칭찬해서가 아니라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내가 나 자신에게 잘했다고 칭찬할 수 있었으니까.

(고된 일로 괴로워하는 내게 8살 꾸마가 적어준 쪽지)


오늘 생방송이 나가기 전까지 열흘 동안 평균 수명 시간이 4~5시간도 채 되지 못했고 생방 이틀을 꼬박 새우며 방송을 준비했다. 물론 생방이라 변수가 많았고 그리 완벽했던 방송은 아니었다. 예기치 않았던 불상사들이 쏙쏙 생겼지만 나는 그 순간, 최선을 다했다. MC와 출연자 프롬프터가 없어서 내가 그나마 마련된 모니터에 수작업으로 원고 글을 모니터에 내려주면서 위기를 모면했고 생방 직전에도 준비를 하지 않는 연사에게 사정까지 해야 했으며 몸은 하나인데 4~5명의 출연자들을 케어해야 했다. 나는 뛰었다. 고되고 힘들었는데 지나고 나니 그 때, 10년 전 방송 마지막 스텝 스크롤에 내 이름이 있다고 좋아했던 막내처럼 가슴이 뛰었다.


프롬프터도 아니고 모니터 화면에 원고 글을 편집해서 올리고 그걸 MC한테 전달하는 일이었지만 나는 MC가 나를 보든 말든 호흡을 함께 하기 위해 고개를 끄덕이고 마스크 안쪽으로 숨죽이면서 함께 원고를 읽어나갔다. 좋았다. 누가 알아주지 않았지만 나는 그 순간 경단녀가 아니라 프로 방송작가로 돌아갔다. 내가 하는 일을 200%까지 끌어올리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여전히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되면 괴롭고 힘들 것이다. 하지만 내가 나 스스로를 알 속에 가둬놓지 않고 알을 깨고 나왔던 순간을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다. 다른 사람의 잣대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 해냈다고 만족하고 나의 잘한 점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으니 전혀 괜찮지 않았던 내가 조금은 괜찮아졌다. 그리고 앞으로도 괜찮은 날들이 이어질 것 같다.

(밤 11시 퇴근해서 발견한  책상 위, 개봉된 빼빼로와 꾸마의 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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