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이야기
성장통
하늘이가 바들바들 떨며 울고 있다. 젖을 먹여도, 놀아주어도 소용이 없다. 자그마한 얼굴, 거기에 커다란 눈. 그리고 피어 나오는 눈물. 그것을 지켜보니 마음이 찢어진다. 아내의 말에 따르면, 요즘 들어 잘 때 시름시름 앓고, 땀을 흘리며 운다고 했다. 잠깐 하늘이가 우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도 가슴이 타 들어가는데, 아내는 어떠했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쓰리다. 그런데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것이 가장 슬프다.
그러나 그 아픔을 하늘이 홀로 이겨 내야 한다. 자람을 위해서 고통을 이겨 내야 한다. 버티다 못해 하늘이는 또 한 방울의 눈물을 흘린다. 이럴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이 참 슬프다. 그리고 하늘이를 안고 왼쪽 어깨에 걸친다. 하늘이의 눈물이 왼쪽 뺨에 닿는다. 하늘이의 울음소리가 귓가에 가득하다. 아프지만 지켜본다. 그리고 무너지는 가슴으로 하나님께 기도한다.
초등학교 5학년. 울산 고모 댁에 갔다. 당시 치킨을 한 마리 먹고, 라면도 먹을 수 있던 시절. 항상 삼겹살을 먹을 때 상추에 두 개, 세 개를 넣어 먹던 시절이었다. 어머니께서 늘어나는 뱃살이 걱정되셨는지 삼겹살로 향하는 내 손등을 ‘탁’하고 치던 슬픈 시절이다. 그날도 고모댁 찬스를 통해 양념과 후라이드를 거하게 먹고 소화를 잘 시키고 잠이 들 던 때였다. 잠을 자다가 갑자기 다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마치 누군가가 내 다리의 허벅지와 종아리를 잡고 잡아 당기는 거 같았다. 급기야 일어날 수밖에 없었고, 새벽에 고모댁에서 터질만한 소리를 넘어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고모가 달려오셨다. 그리고 내 다리를 계속 주무르시며 말씀하셨다.
“상민이가 많이 크려나보다.”
성장통이었다. 서울대학교 병원 의학정보에 따르면 성장통 [growing pain]이란, 주로 3~12세 사이에 발생한다. 특히 남자아이에게 더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로 하퇴부, 대퇴부의 심부 근육층 또는 무릎관절, 대퇴관절부의 심부 통증을 호소한다. 생각해보니 당시 내 인체에 있어서 가장 큰 변화가 있던 때였다. 몸이 자라기 위해서는 자연스레 따르게 되는 고통을 성장통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돌아보니 비단 인간의 몸이 자랄 때뿐 아니라 무엇인가 자라기 위해서는 성장통을 겪는 것 같다. 그것은 때때로 인간관계 속에서도 일어난다. 한 사람과의 관계를 맺어 갈 때 그 관계가 자라기 위해서는 성장통이 필요하다, 특히 질풍노도의 시기라 불리는 청소년들과 관계를 맺는 부분에 있어서 생기는 성장통의 아픔은 강력하다.
조이와의 관계에도 성장통이 있었다. 자유롭고 자신의 색을 표현할 줄 아는 18세 소녀 조이. 자신의 통통 튀는 성격처럼, 옷을 입는 센스도, 색을 고르는 특유의 개성이 가득한 친구였다. 자유로움이라는 단어가 참으로 잘 어울리는 조이. 자신의 감정을 분명하게 표현할 줄 아는 조이 모습이 좋았다. 그러나 이따금씩 대화 속에서 아슬아슬할 때가 있었다. 서로의 의견이 어긋나는 상황이 나올 때 다름에 대한 존중이 있어야 했는데, 그 부분이 내게 부족했다. 또한 조이는 당시 스스로가 이해되고, 납득이 되는 상황이 되지 않으면 몹시 어려워하던 상황이었다. 결국 우리의 관계 속에서 성장통이 극렬하게 일어나는 사건이 일어났다.
“너 계속 그렇게 할 거면 그만둬.”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해버렸다. 말을 하면서도 맘속의 두려움이 있었다. 설마 조이가 그만둔다고는 하지 않겠지? ‘단호박’이라는 별명을 가진 내게도 함께 하던 팀원 중 하나가 떨어져 나가고, 없어지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었다. 그렇게 말했던 이유는 당시 제자반을 인도하던 친구 지환이를 조이가 시비조로 대답을 계속했다는 이유였다. 당시 조이는 친근감의 표시로 가볍게 장난을 쳤다. 나는 조이에게 단호하고, 분명하게 그와 같은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고 제지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을 이성의 판단을 넘어선 감정이 실리는 소리를 내뱉었다. 결국 잠시 훈련을 멈추고 일대일로 상담이 들어갔고, 이미 감정의 골이 깊어진 조이의 눈에는 억울함과 분함의 눈물이 흘렀고, 그때야 비로소 나는 ‘이건 아닌데…’하며 뼈아픈 후회를 하고 있었다.
감사하게도 조이는 신앙훈련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의 관계는 서먹해졌다. 아니 조이를 서먹하게 대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 함부로 말했던 것들에 대한 미안함이었던 것 같다. 하나님께 나아가며 기도하는 가운데 용서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나이는 어리지만, 내가 가르치는 자이지만 ‘용서’를 구해야 했다.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구했고, 용기를 내어 조이를 찾아갔다. 고맙게도 말을 꺼내기 전에 조이는 먼저 내게 죄송하다는 말을 건네주었다. 조이와 나와의 관계가 자라는 순간이었다. 나 역시 진지한 마음으로 용서를 구했다. 이후 조이는 사역의 현장 가운데 커다란 힘이 되어주었다. 진심으로 서로를 기도해주며, 축복해주는 관계로 우리의 관계는 한층 커져갔다. 그리고 지금은 찬양팀의 교사로 섬기며, 나를 위한 커다란 중보기도자로 동역하고 있다.
하늘이가 우는 것은 성장통 때문은 아니다. 신생아에게 성장통이란 질환은 없다. 그러나 하늘이를 바라보며 자람을 위해 애쓰는 모습에 그 단어가 가슴에 박혔다. 자람에는 아픔이 필요하다. 때로 그 아픔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결국 자람을 위해서는 두 가지 선택을 하는 수밖에 없다. 아픔을 겪으며 자랄 것인지? 아니면 그 아픔으로 인해 자람을 포기할 것인지? 만약 그 옛날 내게 느껴진 성장통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다리를 잘랐다면 어땠을까? 아마 나는 이렇게 자랄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조이와의 관계가 너무나 고통스러워 관계를 끊고 그저 서먹한 관계로 보냈으면 어떠했을까? 아마 소중한 믿음의 동역자를 놓쳤을 것이다. 자람에 따르는 그 아픔과 고통. 그러나 그것들은 반드시 나를 세워 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어제도 잠을 뒤척이며 힘들어하는 하늘이의 머리에 조심스레 손을 대고 말해본다.
“하늘아. 아프고, 고통스럽지? 그런데 어제 너의 한 달 전 사진을 봤거든. 정말 많이 자랐더구나. 잘 자라서 고마워. 힘내. 그리고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