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언어
교회. 그곳은 내게 처음 들어설 때부터 “... 하지 마라”의 연속이었다.
다소 낯선 예배당에 담배를 급하게 끄고 찾은 중고등부실. 선생님들은 레이저를 쏘는 듯 내 외모와 채취에 민감하게 반응하셨다. 학창 시절 담배를 폈던 나는 교회에 들어가자마자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급작스레 알려주는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적잖이 당황했다. 물론 미성년자로써 담배를 피우는 건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교회는 “하지 마라”로 둘러싼 사람들이 가득했고, 무겁고 버거웠다. 담배 피우지 마라. 욕 하지 마라. 술 마시지 마라. 거짓말하지 마라. 늦지 마라. 졸지 마라.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내게 염색하지 마라, 샌들 신고 오지 마라. 태어나 이토록 하지 마라고 하는 생소한 집단을 처음 겪은 나로 하여금 교회는 다소 배타적이고, 강압적이며, 죄책감을 유발하는 곳으로 느껴졌다. 그게 교회의 첫인상이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의 메시지와 그분의 공생애 기간의 사역에는 “...하지 마라”라 보다 “...하라”의 초점이 많았던 것을 교회는 눈여겨 봐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 하지 마라”로 묶여있던 세상 속에서 “... 하라”라고 하시며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 특별히 “... 하라”의 명령 중에 교회는 “먹고 마시라”는 명령의 의미를 회복하고, “먹고 마시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몸과 피인 떡과 잔을 먹고 마시라고 명령하셨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명령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교파의 스펙트럼을 초월하여 성공회부터 제도권 교회, 선교단체까지 지속적으로 그리고 서로 비슷하게 실천되어 오고 있다.
유진 피터슨은 “현실, 하나님의 세계”에서 거룩한 성찬을 받는 것은 우리가 구원 속에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놀이에 참여하면서 주 경외함을 기르게 하는 초점 연습이라고 말하며 두 가지 성찬을 통해 일어나는 일에 주목한다. 하나는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예수님을 선포하는 것이다. (355~356) 성찬을 통해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은 단순한 정신활동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두고 유월절 밤에 제자들과 함께 행하셨던 행위를 다시 시행하는 것이다. 교회가 모여 성찬을 통해 먹고 마심을 통해 성도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 흘리신 피와 찢긴 몸을 오감으로 느끼며 참여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선포하는 것.”은 성찬을 참여할 때 일어나는 두 번째 일이다. 성찬을 통해 우리는 구원을 위해 쏟으신 피와 찢긴 살을 받게 된다. 오직 예수님의 죽음만이 구원을 이루셨음을 먹고 마심을 통해 알게 된다. 성찬을 통해 교회는 기억하게 되고 전하게 된다.
“먹고 마심”을 통해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 단순하게 경건한 삶을 유지하고, 하나님을 위한 심부름 꾼이 되는 것으로 종결지으려는 삶에 경종을 울린다. 성찬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기억하게 만들며, 그분을 더욱 전하도록 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더욱 먹고 마셔야 한다. 따라서 성찬을 일 년에 한두 차례 이벤트식의 해치우기 행사로 여기면 안 된다. 더욱 성찬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고, 또 가르쳐야 한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저녁 제자들을 불러 모아 나누었던 마지막 식사의 마음을 철저하게 기억하고, 그 의미가 되살아나도록 해야 한다. “성찬은 예수님께서 세상의 구세주이자 우리의 구세주로서 우리 앞에 계시게 하고, 우리 자신을 구원이 필요한 죄인으로 있게 해주는 기독 공동체에서 실천되는 결정적 행위다.(359)” 교회에 지금 필요한 것은 신앙적 도덕주의에 갇혀 “... 하지 마라.”의 수많은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분의 구원을 위한 죽음을 먹고 마시는 “성찬”통한 “...하라“를 누리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