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라는 여행
결혼 9년차. 결국 설거지 합격!
5월 17일. 이날은 내 인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날이다. 나무 위키에 따르면 1980년 5월 17일은 전두환과 노태우를 비롯한 신군부(하나회) 세력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 24시 부로 발효시키면서 정권 탈취 시도한 날이고, 2019년 5월 17일은 대한민국 수립 100주년이 되던 날이었다. 그리고 1981년 5월 17일은 가수 임정희 씨가 태어났고, 1983년 5월 17일엔 코미디언 강유미 씨가 태어났고, 2020년 5월 17일은 2020년까지 대한민국 최고령자(117세) 이화례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날이다.
그리고 2021년 5월 17일은 결혼 9년 만에 아내에게 처음으로 나의 설거지를 인정하며 이와 같은 말을 남긴 날이다. “설거지 이제 잘하네요. 내가 하산해도 되겠네요.” 물론 아내의 하산을 바란 것은 아니다. 그것을 위해 지금까지 이토록 달려온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내 안에 감도는 뿌듯함과 감격을 좀 더 음미하기 위해서다. 지금까지 오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가? 얼마나 많은 설거지가 있었는가? 얼마나 많은 노력이 있었는가?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하고, 이곳까지 이른 나에게 칭찬해 주고 싶다. 그래서 그 인정과 칭찬을 눈을 감고 받아 누렸다.
남자 셋, 여자 하나로 살아간 우리 집은 어머님께서 자식사랑이 대단하셨다. 언제나 방은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고, 와이셔츠는 항상 말끔하게 다려져 있었으며, 밥과 설거지는 늘 엄마몫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찌 그리 철이 없었을까?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렇게 자란 나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어머님께서 밖에서 일을 하시고 들어와서도, 그렇게 나를 먼저 챙겨주셨다. 나의 배고픔과 나의 피곤함에 맞춰주셨고, 화장실과 거실, 주방과 식탁에 차려지고, 이루어지는 것이 저절로 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들을 대부분이 어머니께서 이루고 계셨다는 것을 결혼 후 알게 되었고, 아이를 낳고 나서 뼈저릴 정도로 느끼게 되었다.
더 이상 나를 먼저 생각하고, 나의 피곤함과 나의 배고픔이 우선으로 여기게 되면 가정을 이루어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아이를 키워가는 것은 절대 혼자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육아를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육아와 살림은 함께 해 나가야 하는 당연한 나의 일로 여겼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설거지와 쓰레기 버리기, 하늘이 씻기기와 화장실 청소 등을 자연스럽게 내가 주도적으로 했다. (물론 나머지 일도 나의 일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늘어나지 않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설거지였다. 군에서 간부 식당 설거지 지원을 자주 나갔기 때문에 나름 자신 있던 설거지. 그러나 그 시절 잘못 배운 설거지 습관으로 인해, 오히려 나의 설거지는 시간이 지나도 좀처렴 나아지지 않았다.
우선 설거지에는 기본적으로 순서가 있고, 진행 시 주의 사항이 있고, 설거지 후 정리가 있다. 또한 설거지가 평소 잘 이루어지기 위해 주기적으로 행해야 할 것들이 있다. 그것들을 전부 익히고, 자연스럽게 해 나갈 수 있는 데 까지 9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이것만 보더라도 내가 얼마나 설거지를 그동안 안 했으며, 얼마나 그동안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했는지에 대해서 정확히 나오는 부분이다. 설거지에는 기본적 순서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눈에 보이는 대로 진행했고, 그릇 하나 닦을 때마다 세제를 짜고, 또 짜는 설거지 법으로 한동안 진행했다. 이런 부분으로 인해 나와 우리 가족이 한 해 동안 세제를 얼마나 먹었을까? 생각해보면 아찔하다.
내게 필요한 것은 아내를 향한 인정이었다. 20대부터 자취를 하며 살아온 아내는 이미 어느 정도 집안 살림에 능숙한 사람이었다. 그래서일까? 아내가 집안일을 시작하면, 말 그대로 집안이 살아났다.
프로 집안살리머였다!
물건들은 아내의 손에 제자리로 찾아가서 자신의 정체성을 마음껏 드러냈고, 요리 재료들은 아내를 따라 다니며 다양하고, 멋진 맛으로 변화되었다. 그런 아내를 형안 인정. 그녀에게 배워야 하고, 배울 수밖에 없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인식이필요했지만 내게는 못난 자존심이 튀어나와 있었다.
결국 내 방식이 형편없다는 걸 인정하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고, 살림에 대한 배움은 더뎌 갔고, 아내의 말은 잔소리로 들리기만 했다. 나는 마음이 어려워졌고, 살림을 회피하고만 싶어 졌다. 내 속에는 학창 시절, 총각시절 어머니께서 모든 걸 해주시던 모습들이 그리웠고, 아직도 그 시절의 것들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오래 묵어 두었던 김칫독은 김치를 비우고 씻는다 해도 바로 김치 냄새가 배어있기에 바로 쌀독으로 쓸 수 없다. 김칫독이 쌀독이 되기 위해서는 완전히 김치 냄새가 없어 져야만 온전한 쌀독이 될 수 있다.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서는 어릴 적부터, 총각시절까지 여겼던 집안 살림에 대한 생각과 개념을 모두 버리고 없애야만 했다. 그렇게 될 때 아내가 이루어가는 집안 살림을 받아들이고, 배우고 함께 할 수 있다.
결국 9년이라는 시간은 나의 설거지를 자라게 했다. 자연스레 설거지 순서가 존재하고, 가장 기름진 것과 유리컵을 어떻게 씻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또한 세제를 매번 펌핑해 쓰기보다 한 그릇에 물과 담가 쓰는 것이 훨씬 안전했고, 특히 설거지는 마무리가 무엇보다 중요하기이 마친 뒤 가스레인지에 떨어진 기름때와 재료들도 잘 정리해야 하고, 싱크대 역시 간헐적으로 과탄산 수소로 닦아야 한다는 것 등 설거지 알 수 있었다.
드디어! 2021년 5월 17일. 결혼 9년 차! 아내가 하산해도 되겠다는 합격을 선언했다.
합격의 통보와 함께 집안을 살리고 있다는 거대한 기쁨이 나를 가득 채웠다. 9년이라는 시간. 오랜 시간들 속에서 나는 설거지로 인해 김치 독에서 김치 냄새가 빠지듯 어느새 내 영혼을 말갛게 씻어 나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정연복 시인의 설거지라는 시가 내게는 더 가까이 다가온다.
나는 접시의 겉을 닦지만
설거지는
내 영혼 깊숙한 곳을
말갛게 씻어 준다
<정연복 시 "설거지" 중에서>
이제 겨우 설거지 하나 합격했다. 앞으로 합격해야 할 것들이 아주 많다. 청소, 빨래, 요리, 육아 등등. 하지만 이것들이 더이상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9년이 걸려 설거지를 합격해서 일까? 서두르지만 안는다면 할수 있다는 작은 자신감이 피어오르고 있다.
그리고 우리 부부의 사랑도 그렇게 조금씩 자라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