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에 대한 생각
옷에 대하여 눈이 떠지던 사춘기 시절. 내 곁엔 패션에 있어 한발 먼저 나아가는 친구 녀석이 있었다. 짧은 스포츠머리를 커버할 정도로 옷에 대한 감각이 있던 녀석은 봄에는 칼 구두에 6 통반으로 줄인 기지(양복 옷감 일본말) 바지, 거기에 광택이 도는 재킷까지 맞춰 입고 수원의 핫 플레이스 남문을 다녔다.
역시나 우리 중에서 가장 튀던 녀석. 하루는 나에게 특별한 제안을 했다. “이번 주 토요일 밤에 동대문 두타 갈 건데 같이 갈래?” 여기서 동대문은 서울의 동대문을 말하는 것이고, 두타는 당시 패션 피플의 심장 격인 두산타워를 말한다. 지하 7층, 지상 34층으로 이루어져 서울 4대 문 안에 가장 높은 빌딩을 자랑하던 두산타워. 패션으로 말할 거 같으면 나보다 두세 수 앞선 녀석의 제안이었기에 기쁨으로 수락했다.
늦은 밤 도착한 동대문역. 친구는 내게 담담하지만, 분명한 어조로 미션을 줬다. “누가 부르던, 옷을 잡아당기던 앞을 보고 나를 따라와.”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몰랐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블랙홀처럼 빨아드리는 호객행위에 정신없이 빨려 들었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서있던 곳은 두타가 아니라 동대문 지하상가의 팔뚝과 목과 어깨 사이의 문신이 형님이 운영하던 옷가게.
이곳보다 싼 곳은 없다며, 다른 곳보다 잘해준다며 부드럽게 말하던 짙은 화장을 한 누나의 말에 가게 안쪽으로 들어왔고, 어느새 내 앞에 거대한 팔뚝에 용 그림의 쫄티를 입고 있던 조폭 같은 사람이 서있는 줄도 모른 채 나는 청자켓을 만지작거렸다. 상황이 어찌 되었든 당시 유행하던 청자켓이 맘에 들었다.
그러나 라벤더 향수가 쏟아진 듯한 화장 짙은 누나는 사라지고 어느새 담배냄새 가득한 덩치 큰 그는 협박조로 내게 말했다. “청자켓 여기가 제일 괜찮으니까. 입어봐” 그러나 당시 나는 살집이 많았다. 그리고 유행하던 청자켓은 모두 슬림한 느낌. 옷에 맞지 않는 내가 싫었고 몇 개 들었다 놨다 하며 나와 친구는 눈빛을 교환했다.
어떻게 그곳을 탈출했는지 모르겠다. 나오면서 온갖 협박과 쌍욕을 먹은 것은 생각이 난다. 그리고 도착한 두타는 이 세상 패션리더들이 다 모인 듯, 어깨와 어깨가 부딪치며 다녀야 할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결국 나는 맨투맨티 한 개 샀고, 돌아오는 길에 달달한 떡볶이를 먹고 새벽에 내려왔다. 검지와 집게손가락 사이에 청자켓의 촉감을 남겨두고.
그리고 10년 뒤. 일본의 하라주쿠를 방문한 적이 있다. 두타의 사람들이 비슷함 속에서 나름의 개성을 표현하려 했다면 하라주쿠의 일본인들은 형형색색 자신의 멋과 맛을 표현했다. 다른 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 피어싱과 헤어스타일, 화장과 팔찌까지 정말 다양한 표현들. 옷에 맞춰 나에게 입힌 게 아니라 나에게 맞춰 옷을 고른 모습에 자신감이 느껴졌다.
특히 그 가운데 나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한 20대 초반의 옷에 눈이 갔다. 특히 늘씬한 그가 입은 청자켓의 자태는 한동안 시선을 멈추게 할 정도였다. 그렇게 바라보는 내내 나의 자존감은 행사가 마친 뒤 삼일이 지나 쭈그러진 풍선처럼 쉬이 쪼그라들고 있었다. 청자켓은 아직도 내 몸을 거부했고, 오토바이탄 정우성의 청자켓은 나 같은 사람과 어울릴 수 없다며 멀리 달아났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며, 청자켓의 꽉 끼고 푸르스름 보단, 조금씩 여유 있는 카키와 베이지 색에 익숙해질 무렵. 평소 즐겨 입던 청바지를 구입하기 위해 아내와 근처 쇼핑몰을 찾았다. 봄기운이 가득한 그때 여름을 기다리듯 쿨톤 가득한 청바지를 들었다 놨다 했다. 어린 시절 너무 비싸서 걸쳐보지도 못했던 한 브랜드. 이제는 겸손한 가격으로 다시 책정이 되어서 감사하게 청바지를 골라보는데 한 벽면에 마네킹이 걸치고 있는 재킷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청자켓이었다.
마네킹의 몸에 너무나 찰떡으로 어울리는 모습에 잠시 눈을 떼지 못했다. 마네킹 근처에 서성이며 만지작 거리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장님께서 말씀하셨다. “청자켓이 잘 나왔어요. 손님하고 참 잘 어울릴 거 같은데 한번 입어보세요.” 지난 세월을 살아오며 수차례 드나 들었던 옷가게에서, 이토록 내 마음을 꿰뚫고, 행복을 가져다주는 말은 처음이었다. 그 순간 사장님을 향해 청자켓을 입고 마음을 다해 불러드리고 싶었다.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내가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해바라기 - 행복을 주는 사람 중에서
그러나 수많은 세월 속에서 청자켓 앞에서 패배자였던 나. 감히 나란 존재가 청자켓을 걸칠 수 있는가? 생각하고 있는데 한 번 더 내게 천사의 음성이 들렸다. “한번 입어봐요. 괜찮을 거 같은데.” 용기가 생겼다. 만약 나 혼자였으면 도저히 건들 수 조차 없이 기세 등등한 여포와 같이 우뚝 솟아 있는 녀석이지만, 내 곁에는 지금 청자켓의 특성을 너무도 잘 아는 장비의 용맹함을 닮은 사장님과 나를 너무도 잘 알고 있어 기운을 불어넣는 관우 같은 아내가 있다.
결국 나는 청자켓을 들었다. 그 옛날 몸에 너무 꽉껴서 창피함을 가져다준 청자켓, 그러나 일본의 하라주쿠에서 너무도 멋들어지게 소화하며 휘향 찬란한 매력을 보여준 청자켓. 조심스레 나의 오른팔을 깊게 넣어본다.
나는 알고 있다. 팔만 넣어도 승리의 기세를 몰아갈 수 있을지, 아니면 철저하게 패배하고 도망갈 건지. 청자켓 오른 소매까지 나의 오른 팔이 장착될 무렵 나는 엄청난 쾌감을 느꼈다.
"바로 이거야. 이 옷은 나를 위해 태어났고, 내 몸에 맞춰 만들어졌구나."
결국 그토록 기세 당당하던 청자켓은 방구석 여포로 전락해 버렸다. 결국 그 자리에서 나는 청자켓을 결제했다. 그리고 그동안 몸에 맞춰 옷을 찾으려 전전긍긍하며 초라하고 질긴 그 모습을 청자켓과 구입하며 떠나 보냈다.
이제 나는 더이상 옷에 맞춰 내몸을 구겨넣지 않는다. 청자켓을 내몸에 맞췄듯 그렇게 내 마음에 드는 옷을 내 몸에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