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네번째 이야기
피로가 몰려왔다. 발끝부터 타고 오르는 피로가 온몸을 쥐어짰다. 움직이기 싫었다. 한동안 누워있었는데 아내가 내 눈치를 본다. 몇 번 하늘이가 놀자고 했는데 “조금 이따가”를 몇 번이나 말했다.
그러자 아내는 하늘이에게 일러준다.
“아빠는 오늘 많이 피곤한가 봐! 엄마랑 놀자.”
그렇게 눈을 감고 누워 있는데 목이 말랐다. 귀찮음과 피로에 일어나기 싫었다. 그저 갈증을 누르는 피로에 못 이겨 늘어져 있을 때 하늘이가 찾아왔다.
“아빠 아파?” 작은 입에 동그란 눈으로 말하는 하늘이가 귀엽다.
그리고 “아빠가 피곤해서 그래.” 그러자 하늘이가 말했다.
“비타민 주스 먹고 싶어? 비타민 주스 먹으면 힘이 막 나”
그러더니 비타민 시럽을 탄 물을 가져다 주었다.
순간 뻑뻑했던 입안은 생기가 돌기 시작했고, 축 늘어진 내 마음에 활력이 솟아났다. 마음이 담긴 누군가의 섬김에 기운이 났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마음이 없는 섬김도 있다.
얼마 전 충격적 사건이 우리나라 국민들을 분노로 몰아넣었다. 역대 가장 많은 청와대 국민청원을 받은 사건. 바로 “N번방 사건”이다. 그릇된 성적 쾌락을 위해 여학생들을 착취하여 영상으로 수많은 사람과 공유한 사건. 그로 인해 이익을 챙긴 일당이 잡혔다. 그 가운데 모든 걸 주도한 조주빈은 참으로 모순된 모습을 보여 더욱 마음을 어렵게 했다. 그가 극악무도한 죄를 저지르면서도 최근 3년간 총 57차례 자원봉사를 한 것으로 파악됐다. 장애인 복지시설과 미혼모 시설에서 봉사를 하며 그와 같은 엄청난 죄를 저지르는 두 모습을 보며 나는 많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과거 5년간 보육원에서 봉사를 하며 알게 된 분이 생각났다. 대화를 할 때마다 스스로의 필요와 당위를 자랑하던 분. 한 번은 그런 분과 대화를 오랫동안 할 기회가 있었는데 자신의 섬김을 무용담처럼 말했다. 지루했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무미건조했다. 시간이 지나며 알 수 있었다. 그분 주위에 사람들은 별로 없었고, 함께 섬길 기회가 생기면 사람들은 불편해했다. 자신의 의로 가득한 섬김 속에는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정말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분들이 있다. 그분들 안에는 깊은 사랑이 있다. 어느 상황에서도 우위를 선점하려 들지 않는다. 그리고 섬김의 능력이 있다. 한 번은 기회가 되어 15년 넘게 진심을 다해 섬기는 분과 대화한 적이 있었다. 그분은 언제나 사랑을 잔뜩 들고 오셨고,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선 겸손하게 말씀하셨다. “항상 이곳에서 저는 사랑을 받고 갑니다. 제가 섬기는 것 같지만 오히려 섬김을 당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신기한 건 그분과 함께 섬기고, 봉사하면 섬기는 힘이 전염되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일생을 섬김의 본으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전염시킨 마더 테레사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는 빵 한 조각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도 많지만, 작은 사랑도 받지 못해서 죽어가는 사람은 더 많다.”
이 땅에 모든 사람은 섬김이 필요하다. 나의 삶 속에도 수많은 섬김을 통해 세워졌고,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누군가의 섬김 속에 진심이 없고, 사랑이 없는 섬김은 아무 의미가 없어지고,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섬김이라는 단어의 동의어는 사랑이어야 한다. 마더 테레사의 말처럼 이 땅에는 빵 한 조각보다 더 시급한 것은, 작은 사랑이 아닐까? 하늘이의 물 한잔의 섬김이 이렇게 기운을 차리게 하고, 글을 쓰게끔 하는 것도 어쩌면 그 안에 사랑이 듬뿍 담겨서 그렇지 않을까? 하늘이의 핑크색 시크릿 쥬쥬 컵을 바라보며 어느새 굳어진 얼굴과 몸에 힘이 잔잔히 퍼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