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다는 말은 하는 순간 더더욱 얼굴이 발개지고 가슴이 콩닥거리는 느낌이 드는 말이다. 나는 언제 부끄럽던가?
어린 시절의 나는 내성적이고 말도 별로 없던 아이였다. 교우관계가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서서 먼저 무언가를 제안하거나 행동으로 보여주는 아이는 아니었다. 훗날 그 시절의 동창을 만났을 때, “나는 말도 거의 안 하고 거의 먹지도 않는데, 모임에 나오는 게 맞는지 모르겠어.”라 했었다. 친구는 “너는 그 모습 그대로 있는 게 네 모습이야. 전혀 이상하지 않아.”라 해주었다. 생각해 보면 그런 내 모습이 부끄러웠던 적은 없다.
처음으로 엄마가 부끄러웠던 적이 있다. 6학년 때였다. 친구가 집에 놀러 왔는데, 다른 친구들 집에 가서 했듯이 가족 앨범을 꺼내어 같이 보면서 희희낙락했다. 내 어린 시절을 돌아보며 친구와 한껏 즐거웠었다. 친구가 돌아갔을 때 엄마는 나를 보며 불같이 화를 내셨다. 앨범은 이불장 아래 서랍에 들어있었다. 꾀죄죄한 세간살이를 친구에게 고스란히 내보였단 이유였다. 너는 대체 부끄러움도 모르냐면서. 그날 내가 슬펐던 건 부끄러움도 모르고 엄마한테 혼난 게 아니었다. 나는 한 번도 부끄러워한 적 없는 내 부모님과 가난하던 시절의 세간들이 엄마에게 부끄러움이라는 사실이었다. 그 후로 나는 더더욱 못난 모습을 보이지 않고 감추려 노력하며 살았던 것 같다.
아이를 키우다 보니 당황스러운 때가 종종 있다. 주로 어른이 어른답지 못한 상황에 맞닥뜨릴 때이다. 길을 걷다 아이를 치고 갔으면서 사과하지 않는 경우, 약속을 하고서 지키지 않고 미안해하지 않는 경우뿐 아니라 앞뒷말이 다른 경우나 본인의 고집만 피우는 경우 등 셀 수 없이 많다. 혹자는 사회생활에서의 처세나 융통성인 것처럼 퉁치기도 한다. 동방예의지국을 외치며 장유유서만을 외치기도 한다. 끝없이 많은 예들을 접하면서 부끄러움은 그들 몫이 아니라 내 몫이 되었다. 나라고 늘 이성적이고 합리적일 수는 없다. 그러나 아이들 보기 부끄러운 어른이고 싶지 않아서 부단히 노력을 한다. 행여나 약속을 잊거나 어기게 되면 미안하다고 진심으로 사과를 한다. 아이들은 생각보다도 훨씬 더 많이 유연하고 마음 넓게 어른을 이해해 준다. 물론 아이들에게 마음을 열고 그들의 존재를 인정해 주는 경우에서이다.
사실 아이와의 상황이나 어른들 간의 상황이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이를 대하는 어른의 태도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일방적인 경우가 많다. 자신을 부정당하는 사람이 과연 포용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대체 나이가 무슨 문제가 되는 걸까? 하나의 인격으로 대하면 똑같은 사람일진대…
아이들이 사춘기 연령이 되면서 어른의 모순을 더 많이 발견하고 힘겨워한다. 나는 늘 궁금했다. 어른이라고 말하려면 어른다워야 하지 않나? 왜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아이에게 사과할 줄 모르고 되려 예의운운하며 아이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걸까? 아이는 세상을 배우는 과정 중에 있는데, 좀 더 따스하게 아이를 대하고, 잘 못하는 것이 있으면 다독이며 알려주지 않는 걸까? 어른이 사과하고 반성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일까?
내가 어른들의 어른답지 못함에 부끄럽고 발끈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기저에는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억눌림이 너무 가슴이 답답하고 힘들었었던 것 같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크게 내색하지는 못하고, 부모님을 위시한 어른들의 부조리를 보면서 부끄러움을 쌓아온 것 같다. 내가 눈감고 지나갔던 상황들이 아이에게 닥치니 마치 내가 그런 듯이 더더욱 부끄럽게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