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by 물빛

사람이 신뢰를 쌓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약속을 지키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약속이라는 낱말을 보는 순간, 남편의 옛 모습이 떠올랐다.


남편은 대학교 과친구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우리 과 다른 친구들과 곧잘 어울린다는 소문을 들었었는데, 나는 왠지 만날 기회가 없었다. 2학년 여름방학 때 유럽여행을 다녀왔다.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날, 내 친구와 함께 나와서 처음 보았다. 다른 지역의 학교를 다니던 이라 별로 볼 일이 있을까 싶었다.


2학년을 마치고, 친구가 군대를 가면서 종종 연락을 하게 되었다. 삐삐라 불리던 무선호출기가 연락수단이던 시기였다. 삐삐는 수동적인 소통수단이다. 삐삐에 번호가 찍히면 번호를 확인하고, 공중전화 줄을 서서 동전을 넣고 남겨진 음성메시지를 듣거나 전화를 해야 했다. 전화통화를 하곤 했는데, 어느 날 삐삐를 살 계획이라고 했다. 매일 삐삐를 쳐줄 수 있냐고 물어왔다. 삐삐가 없는 것보다도 삐삐가 있는데도 울리지 않는 것이 좀 창피한 일이었다. 의도는 잘 알겠고, 한 가지 약속만 지키면 호출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것은 내가 삐삐를 치면 반드시 연락을 할 것이었다. 신경 써서 호출했는데, 답이 없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나 싶었다.


우린 그렇게 매일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다른 지역에 있으면서 매일 연락을 하고 누구보다 서로의 생활을 잘 알기 시작했다. 방학이 되어 본가에 내려온 그와 우리 학교에서 진행되는 영어수업을 같이 들었다. 어느새 연인이 되면서는 격주로 만나기로 약속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편안하고 안전한 기분을 느꼈다. 당시에 쓰던 다음 칼럼에서 나는 언젠가부터 그를 '공기'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알게 모르게 내 안에 남편에 대한 신뢰가 쌓이고 있었나 보다. 그래서였을까? 무료하고 반복되는 일상에서 불쑥 결혼해 달라는 말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러겠다고 말했다. 한 단계 또 진화한 약속이었다. 언제 어디서 일지 모르는 막연한 약속. 다만 결혼은 너와 하겠다는 그 말.


몇 년이 지나 정말 결혼을 하게 되었을 때, 청첩장에 쓸 문구는 고민할 필요조차 없었다.

“지금처럼 한결같이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우리는 공적이든 사적이든 할 것 없이 매일 크고 작은 약속들을 하고 살아간다. 그 약속들 중 얼마나 지키고 살아가는 걸까? 약속은 지키기 위해 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쉽게 잊기도 하는 세상 아닌가? 서로의 약속을 지키며 살아온 세월이 문득 고맙고 뿌듯한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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