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코트 등극

내성적인 관종

by 물빛

작은 아이의 닉네임은 집순이다. 워낙 내성적이라 웬만하면 집 밖에 나서지 않는다. 또래 친구는 거의 없고, 두 살 터울의 큰 아이 친구들이 작은 아이의 친구이다. 같은 학년인 또래 아이들에게는 존칭을 쓴다. 동네에서 초중고교를 다 다니고 있으니 낯익은 얼굴이나 여러 해 같은 반을 한 아이들도 꽤 많다. 하지만, 아이는 학반번호와 얼굴로 매칭하고, 이름을 외우지는 않는다. 무척 이상해 보이지만, 그것이 이 아이에게는 학교에서 또래와 지내고 모둠 작업을 하는 생존방식이었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조금의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같은 반을 네 번째 하게 된 여학생이 있었고, 늘 반의 부반장을 도맡아서 부반장이라고 부르던 그 아이의 이름을 기억했다. 나도 여러 해 듣다 보니 자연스레 기억한다. 이 친구가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같은 반이 되면서, 중학교 때의 일들을 아이에게 담백하게 물어보곤 했단다. 혼자의 잣대로 오해하지 않고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준 그 친구가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아이는 자신이 오롯이 받아들여진다는 느낌을 받은 것 같았다.


아이는 중학교 2학년의 어느 날부터 머리를 기르고 싶어 했다. 학교 담임 선생님은 두발 규정은 없어서 괜찮다고 말씀하셨다. 머리길이가 어깨를 찰랑거리게 되면서부터 남학생이 머리가 길다며 단속하는 선생님들이 계셨다. 두발규정은 없다고 말씀드리자, 단속하려던 선생님은 태도불량 등을 들며 벌점을 주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머리를 자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나름으로 소통이 어렵고 규정이 빠듯한 학교에 대한 불만을 그렇게 표현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아이는 본인의 행동이 규정을 벗어나는지 아닌지 꼼꼼히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고등학교 입학 후 얼마 안 되어 개최된 학교 총회였다. 학교 선생님들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단상에 오른 선생님들 중 눈에 띄는 분이 계셨다. 어깨보다 살짝 내려오는 길이의 머리를 반묶음으로 단정히 묶은 남자 선생님이었다. 담임도 맡고 계시다는 그분은 윤리선생님이셨다. 나는 내심 안도했다. 적어도 머리 길이로 인해 아이가 부당한 벌을 받게 될 일은 안 생기겠구나. 아이는 계속 머리를 길러서 웬만한 여학생보다도 머리가 길다. 나보다도 길어서 집에서는 장모종이라고 부른다. 이것 하나만 걸리지 않아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각 교과별 수행을 완료해 가면서 아이는 점차 학교에 각인되기 시작했다. 사실 아이는 매사에 자신감이 별로 없었다. 자신이 하는 행동에 대해 무언가 늘 불만족스러워했고, 잘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그렇지만, 학교에서 내준 과제는 스스로 해결했고, 의외로 좋은 평가를 받는 일이 늘면서 자신감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학년말에 세특에 적어준다는 교과 선생님의 말씀에 자진해서 자유주제로 발표를 더 하기로 했다.


벚꽃이 필 무렵 담임 선생님이 보내 준 반사진에는 멀뚱히 혼자 떨어져서 찍혀 있었다. 봄의 체육대회에서는 한 발짝 떨어져 앉아있기는 해도 웃음을 띠고 있었다. 가을 현장체험학습에서는 모둠별 기념촬영에서 모둠별 포즈를 취하느라 고양이 머리띠를 하고 웃기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긴 머리 덕분에 급식당번을 하다가 언니로 불리는 일도 종종 있었다. 새로 전학 온 친구들도 독특한 외모로 모두들 기억한다고들 했다. 절정은 음악발표회였다. 모둠으로 해도 되는 장기자랑 같은 시간이었는데, 혼자서 노래와 춤을 준비했다. 노래가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곡이라 일본 교복인 가쿠란을 챙겨 입고서. 소문이 흘러 흘러 반에 아이를 보러 오는 아이들도 생겨났단다.


마지막 발표는 영어였고 담임선생님 수업이었다. 발표자료를 ppt로 만들던 중, 아이는 순간 자신이 좋아하는 게임 캐릭터를 활용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선생님께 발표자료에 캐릭터를 써도 된다는 허락을 받고는, 곧이어 캐릭터 의상을 착용해도 괜찮다는 허가까지 받았다. 아이는 마지막 발표를 재미나게 하고 싶었다고 한다. 일련의 일들로 아이를 기억하는 동급생들과 선생님들은 꽤 기대를 했나 보다. 발표하던 날, 의상을 갈아입고 교단에 선 아이를 선생님은 직접 사진을 찍어서 보내주셨다. 마침 수업이 없던 음악선생님이 아이의 발표가 궁금해서 구경을 오셨다. 반 친구들 뿐 아니라, 다른 반 아이들까지 몰려와서 발표를 하기 전 함께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어느 날 아이는 웃긴다는 듯 말했다.

"엄마, 내가 우리 반 마스코트래요." 상상도 못 했던 학교에서의 반응이지만, 아이는 웃고 있었다. 어이없다는 듯 흘리는 것 같았지만, 한번 잘 생각해 보란 말에 자신의 행적을 되짚어보더니 "그럴 만도 하네요." 한다.


작은 아이는 올해도 여전히 마스코트로 존재한다. 체육대회 때 한 학년 아래의 후배들과 기념사진을 찍어주고, 수학여행에도 새로운 코스튬을 준비해 가서 무대에 섰다. 불과 2년 만에 아이는 엄청 달라졌다. 더욱 고무적인 것은 친구들의 이름을 기억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2학년에는 선택과목 수업이 있어서 이동수업도 잦고, 반 친구와만 교류하는 것이 아닌데, 선택 수업에서 이야기하고 이름을 기억하는 아이들이 늘어갔다.


크리스마스를 보내며 아이는 온라인에서 제 형과 또래 친구들과 함께 게임을 했다. 이전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또래 친구가 생기다니... 더없이 기쁜 일이다. 아직도 동급생에게는 존칭을 쓰지만, 아이들은 그런가 보다 하고 받아들여준다.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사회에 나가면 나이가 다른 사람들과 지내야 하니 존칭을 자연스럽게 쓰는 편이 더 낫다. 아이가 좀 더 세상에 마음을 열면 편안한 사람과 반말도 하게 되겠지.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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