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by 물빛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다. 시간이 문제를 해결해 주는 해답을 주거나 문제가 없어지게 해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명제는 타당한 경우가 많다고 느낀다.


가족으로 인한 상처는 생각보다 깊고 잔인하고 아프다. 별것 아닌 것 같은 생채기가 지속적이고 반복해서 더해지기에 사라지지 않을 흉터를 남기곤 한다. 쳐다보기조차 무서워 고개를 돌리고 싶을 때도 있고, 가슴 한켠에 묻어두어 두 번 다시 들추어내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럼에도 가족이라는 이유로 완전히 단절하지 못하고, 연결고리를 가져가면서 속상하고 아프고 슬프고 힘겨운 경험을 반복한다. 물론 즐겁고 행복한 날도 존재했다. 그렇기에 상처는 더욱더 깊어진다. 문제에 집중하기보다 문제와 전혀 관련 없는 '이전에 내가 너에게 어떻게 했는데...'라는 감정적인 하소연을 달고 가기 때문이다. 어느새 문제의 핵심은 사라지고 나쁜 감정만 남게 된다.


병원에 다녀오느라 힘든 날이었다. 엄마는 굳이 집에 찾아오시겠다고 했다. 집은 어수선하고, 아이들은 제각각의 스케줄이 있었다. 급히 근처의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오후 시간이니 엄마가 좋아하시는 달콤한 라떼를 한 잔 주문했다. 엄마는 다정하다. 늘 무엇 하나라도 챙겨주고 싶어 하고, 귀찮은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다만 그 행동의 기준이 본인이라는 게 문제다. 엄마가 좋으면, 타인도 그럴 거라 생각한다. 심지어 생각과 감정까지도 엄마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면 거침없이 틀렸다고 말한다. 아이가 할머니와의 관계가 불편해진 지점이 바로 거기다. 아이에게는 소중한 존재였던 할머니가 본인의 경험과 생각과 감정을 모두 부정해 버린 것이었다.


명절을 앞두고 소소한 이야기를 빙빙 돌리다가 아이의 이야기를 꺼내셨다. 아이의 입시를 빌미로 입밖에는 내지 않던 이야기였다. 역시나 엄마에게는 감정만 남아있었다. 아프지만, 문제를 상기시켜 드렸다. 깜짝 놀라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잠시 슬픈 얼굴로 변했다가 "그렇다면 내가 사과를 해야지." 하신다. 시간은 그 자체로 약이 되지는 않았다. 대신 엄마는 그 시간 동안 사실과 진심을 들을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아이는 생각보다도 어른들에게 관대하다. 두 번 다시는 말도 섞지 않을 것 같이 굴다가도 화해의 손길을 내밀면 이내 그 손을 잡아준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어른이라 할지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할 때 가능한 것이란 것을.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이전의 신뢰로운 관계로 돌아가는 것은 어렵다. 신뢰를 잃은 관계가 회복되는 데에는 훨씬 더 많은 시간뿐만 아니라 엄청난 노력을 필요로 한다. 아이가 방학을 맞아 돌아올 즈음이면, 일 년이 흐른 시점이 된다. 그동안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분들이 아이가 반갑게 함께 할 거라고 생각하신다. 여전히 당신들의 감정이 해소된 것으로 아이만 철이 없다고 여긴다. 과거의 즐거운 기억을 발판 삼아 어른들이 제자리라 믿는 자리로 돌아오기에는 아이의 상처가 너무나 깊다. 아무래도 시간 그 자체가 약이 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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