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더 나를 잘 아는 사람. 꽤 오랜 시간 동안 나는 그에게 그런 존재였다. 나는 매사에 예민하고 섬세한 타입이고 그 덕분에 그에 관해서라면 사소한 하나까지 다 기억하고 있었다. 고민거리가 생기면 이야기를 하고, 무언가를 결정할 일이 있으면 상의를 했고, 선택을 해야 하면 내게 물어보았다. 일상에서도 대외적으로도 전혀 거리낄 것 없는 상태. 아무런 의심할 것이 없는, 그렇다고 믿고 싶은 생활을 지속했다.
관계가 불편해지는 것은 마음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시작된다. 몸이 힘든 어느 날 듣게 된 사소한 한 마디에 마음이 상한다. 무어라 딱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그 불편함. 나만 느끼는 듯한 예민함으로 치부해 버리는 데에서 오는 작은 분노의 불씨. 그런 작은 것들이 모여 조금씩 조금씩 커져간다. 각자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닌데, 괜찮지 않은 것을 괜찮은 척 자꾸 숨긴다. 편안하고 평온하던 관계가 자꾸만 불편해진다.
의심의 씨앗은 그렇게 발아한다. 처음부터 상대를 의심하는 일은 없다. 완벽하게 서로를 믿고 있다고 여긴다. 그런데, 의도치 않은 신뢰를 깨는 사소한 말이나 행동이 거듭될수록 바위에 똑똑 떨어진 물방울처럼 서서히 스며들고, 색이 바래고, 주위가 습해지며, 관계가 느슨해진다. 어느 순간 더 이상은 그를 믿을 수가 없게 된다. 누군가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가장 불편해지는 것은 내 마음이다. 그가 내뱉는 낱말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의 의미가 다 의아하고 의심스러워진다. 지금 저 말을 하는 의도는 뭘까. 뒤에 숨은 뜻이 더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내 앞에 있는 그는 대체 누구인가. 정신이 혼미하고 아득해진다.
틀어진 관계를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신뢰가 깨졌기 때문이다. 다만 그 관계를 깨뜨리고 싶지 않다면 꼼꼼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 관계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유지하고자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부터 잘 확인해 보아야 한다. 고심 끝에 유지하기로 결정했다면, 다정하게 대하고 약속을 지켜야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는 친절에서 시작되고, 약속을 지키는 모습으로부터 쌓이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