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물빛

꿈이라는 것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잘 잡고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는 점에서 희망적이다.

어릴 적 내 꿈은 정신의학과 박사가 되는 것이었다. 딱히 의사가 되어 진료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정신분석에 대해 호기심이 많았다. 문제는 의대에 입학해야 하는데, 아빠의 반대에 부딪혔다. 딸에게 험하고 힘든 일을 시키고 싶지 않다는 게 아빠의 생각이었다. 내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빠는 약대나 사대에 진학하기를 희망했지만, 정작 나는 그쪽엔 관심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약사도 교사도 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여학생이라 서울유학도 허락받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지역국립대 화학과로 진학했다.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는 삶은 미련이 생긴다. 1학년을 마치고 재수라도 해서 의대 진학을 희망했지만, 부모님은 단칼에 거절했다. 동생을 공부시켜야 하니 부담스럽다는 이유였다. 당시만 해도 나는 부모님 말 잘 듣는 모범적인 학생에 지나지 않았다. 부모님과의 관계가 삐걱거리더라도 당차게 자신의 길을 걷는 이들도 있지만, 내겐 그럴 용기나 의지는 부족했다. 한동안 방황하긴 했지만, 실험하기를 좋아하던 터라 연구실에 들어가서 생활을 하기도 하고, 대학원 생활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미련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요즘 정신과 전문의는 얼마나 핫한 존재가 되었는가.

아빠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와 눈만 마주치면, 약대도 안 가고 사대도 안 갔다며 한탄을 했다. 자격증을 따야 하는 전문직을 택하지 않아 내 커리어에 문제가 생긴 거라고 굳게 믿고 계셨다. 주말부부인데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어, 둘째를 낳은 후에 복직을 선택하지 않은 터였다. 실상은 둘째가 입학할 때까지, 풀타임은 아니지만, 연구원으로 등록하여 커리어는 유지되고 있었다. 부모님 회사로 들어가 일을 시작한 것이 실질적인 경력단절이자 전공단절이 된 것이다. 사실이야 어떻든 아빠 눈에는 나는 아빠의 말을 안 듣는 딸이었고, 내 선택이 옳았다고 항변해 봐야 그건 아빠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빠가 임플란트를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임플란트를 잘하는 치과의사를 찾으실 때 첫째 아이 친구의 엄마를 소개해 드렸다. 대학 1년 후배이면서 교정전문의였고, 치주과 전문인 형부와 함께 치과를 새로 차린 참이었다. 장비가 좋고 깔끔한 치과에서 치료를 결정하고 돌아오던 날, 아빠는 쑥스러운 듯 말씀하셨다. “아빠가 그때는 잘 몰랐다. 외과의만 생각해서 네가 의사가 되지 않기를 원했던 거야. ” 아이를 키우면서도 자신의 전공 일을 하는 후배를 보고서 아빠는 막연히 후회가 밀려온 모양이었다. 당신 딸도 충분히 잘할 수 있었을 텐데 싶으셨던 것 같다. 굳이 부연설명을 하자면 아빠는 베트남 전에 참전하셨던 분이시고, 의무병이셨다. 아빠의 인식 속에서 의사의 역할은 밀려드는 피투성이 부상병들을 관리하는 데 녹초가 된 존재였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 후로는 사대니 약대니 하는 얘기는 쑥 들어갔다.

나는 그때에도 지금도 의사가 되어 진료하는 것에 관심 있던 것이 아니라 사람의 심리나 뇌기전에 관심이 있던 것이었다, 회사에 출근하면서부터는 인강으로 심리학을 공부했었다. 보는 관점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심리학도 아주 흥미로웠다. 부모님은 아이들이 좀 크자 사춘기에는 내가 혼자 아이들을 감당하기 힘들 거라며 종교를 갖기를 권하셨다. “저는 심리학 공부를 해요. 제 마음은 제가 알아서 단련할게요.”라며 종교에의 귀의를 단호하게 물리칠 수 있었다.

내 아이들에게는 다른 꿈이 있다. 아이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이야기해 온 것들이 있다. 자라면서 그 꿈을 서서히 구체화하고 있고,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공부를 하고 노력을 하는 것이 좋을지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와중에 내 아이들에게 의사가 되기를 권하신다. 의사라니… 아이들은 아빠를 닮이 피를 무서워한다. 피 보는 일을 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고 한다. 물론 모든 의사가 피를 보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살아보니 그렇다. 내가 선택하지 못하는 삶은 항상 무언가 부족하고 찜찜하다. 분명 원하는 것이 있는데, 최선을 제하고 차선이나 그다음을 택해야만 할 때는 의욕도 떨어지고, 사실상의 자존감도 없어진다. 내 인생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각자의 인생은 각자의 것이다. 내 자식이라 하더라도 다를 바가 없다. 아이들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아이들이 어렵고 힘든 시기에 부모를 믿고 의지할 수 있게 된다. 진심으로 그들을 사랑하고 지지한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 나는 아이들이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다. 스스로 관심 있는 것을 생각하고 정하고 이루어가는 것이 진정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사는 것이고, 자신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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