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시람들에게는 일말이라도 기대를 하지 않게 되었다. 오랜 시간 동안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온 불신 탓을 해야겠지.
어린 시절에는 좋은 기억도 많이 있다. 따뜻하게 웃는 아빠의 얼굴도 있고, 소녀의 미소를 띤 엄마도 있다. 진심으로 위해 주었던 어른들도 있었고, 정말 마음을 나누었던 친구들도 있다.
열 살이 되던 해에 아빠의 사업이 부도가 났다. 큰아버지의 회사와 맞물린 사건이었고, 아빠 회사가 옴팡 뒤집어썼다. 엄청나게 부유하게 살지도 않았었지만, 쫓겨 다니듯 매해 이사를 다녔다. 부도 전후로 나를 대하는 선생님의 온도가 달라졌다. 3학년이었는데, 1학기와 2학기의 선생님이 다른 사람이었다. 4학년 때 선생님은 2학년 때 정말 좋은 선생님으로 기억했던 분이었는데, 완전히 다른 분이 되셨다. 한동안 아빠는 산속 암자로 몸을 피하셨고, 엄마가 뒷감당을 해야 했다.
나는 엄마의 돌봄을 포기했고, 미진했을지언정 동생 돌보미를 자처했다.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양했고, 아직 미취학인 동생만 챙겨주길 요청했다. 아마도 부모님 눈에는 똑같은 철부지였고 어린애였겠지만, 나는 부모님 손이 안 가는 아이가 되려고 최선을 다했다. 속상하고 슬픈 날은 숨어서 울고 아무렇지 않은 척 책을 읽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았다. 그래도 마음이 힘든 때일수록 피아노로 숨거나 책으로 숨었다.
겉보기에 괜찮아 보이는 것 또는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 정말 괜찮은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마음을 나누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친한 친구들은 집이 멀었고, 부모님은 바쁘고 행여나 나쁜 일이 생길까 운신을 제약하기에만 급급하셨다. 시간이 갈수록 외로워졌다. 삶에서 외로움은 친구라더니 이어폰으로 귀를 막고, 학창 시절을 보냈다. 어느샌가 외롭다는 감정도 흐릿해졌다.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할 일만 했다. 그래서인지, 마음이 너무 많이 아파지면, 몸이 아팠다. 한참 후에야 그게 신체화반응이라는 것을 알았다.
부모님은 선한 사람들이지만, 마음을 의지할 수는 없었다. 선생님들도 현실감각을 익히는데 많은 도움을 주셨다. 사회에서 만난 이들도 앞뒤가 달라 관계를 어긋나게 하는 경우가 수없이 많았다. 내 마음에 드는 이도 없지만, 나 역시 그들 마음에 못 미쳤을 것이다.
대신 사람에 대한 기대가 없으니 좋은 점이 한 가지 있다. 새로운 이를 알게 될 때에 시작점이 0이다. 사람에 대해 기대가 없으니 실망할 일이 없는 것이다. 그 사람을 그냥 그대로 보려고 노력한다. 내 판단을 섞지 않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신뢰가 조금씩 쌓이면, 기쁨도 쌓인다. 오히려 그렇게 진심을 나누고 오래오래 좋은 인연으로 이어갈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