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하노인의 붉은 실에 대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언젠가 맺어질 남녀는 월하노인이 보이지 않는 운명의 붉은 실로 묶어 놓아 원수지간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맺어진다고 한다. 일본에는 그 내용이 만화나 소설 애니메이션 등으로 변형되어서 많은 작품 속에 녹아있기도 하다. 붉은 실은 대부분의 경우 연인의 운명을 이야기하지만, 연인 간은 아니어도 운명이지 않을까 싶은 순간이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첫인상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경우를 지양하는 편이다. 사람에 대해 믿음이 별로 없는 편이기도 하고 지내다 보면 다른 면을 많이 발견하기도 해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친구를 본 순간 좀 다른 느낌이 들었다.
그 친구를 처음 본 건 고등학교 때였다. 2학년 겨울방학에 엄마는 광안리에 있는 작은 학원에 가라고 하셨다. 영어와 수학 수업을 하는 소규모 학원이었다. 학원생은 열명이 채 되지 않았고 여학생은 먼저 다니던 친구 한 명과 나 둘 뿐이었다. 학원생은 드나들기 마련이라 내가 들어갈 무렵 다니다 그만두게 된 친구가 바로 그 친구다. 이름도 제대로 못 들었지만, 왠지 모르게 기억에 남았다. 평일 저녁에는 수업을 하고, 주말에는 수업이 없는데도 나오라고 해서 갔더니 학원 근처 독서실에 와서 공부하라는 것이었다. 어차피 해야 할 공부이고 잘 되었다 싶었다. 워낙 소규모인 학원이다 보니 다들 친하게 지냈다. 점심때쯤이면 근처 분식집이나 중국집에 다들 모여서 식사를 했는데, 그 친구도 늘 함께 했다. 알고 보니 그 친구네 집이 학원에서 제일 가까웠다.
말이 아주 많지는 않고 다정했다. 그 친구는 내 친구와 연애를 하고 헤어지기도 했고, 재수와 삼수를 하게 되면서 마음이 힘들 때면 연락을 하곤 했다. 감정도 풍부한 편이라 서로의 대소사에 기쁨과 슬픔을 나눌 수 있어서 참 평안했다. 때로는 친구 같고 때로는 오빠 같기도 해서 의지가 되었다. 적절한 거리를 잘 유지하는 관계. 더할 나위 없는 사이라고 생각했다. 안타까운 건 내가 결혼하면서 그 적절한 거리가 없어졌다는 점이다. 외국에 나간다고 하더니 소식을 끊어버렸다. 그게 나를 위한 배려였을 거라는 것을 잘 안다. 어디에서건 건강히 잘 지내고 있기만을 바라본다.